이은상 기념사업, 3·15는 통곡한다.
지난 1월 창원시가 옛 마산 상남동(현 노산동)의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이은상작품을 주제로 한 골목길 테마 조성사업이 착수단계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여러 통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앞으로 창원시가 이은상(작품)을 위해 시민들의 혈세를 지원할 근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창원시가 통합갈등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골칫거리를 안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일이다. 사전에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지난날 우리 지역에서 이은상기념사업을 두고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다시 한 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은상기념사업 논쟁은 1999년 6월24일, 마산시가 후세교육의 장으로 삼는 다는 명분으로 총 30억 원을 들여 제비산(노비산) 공원부지에 ‘이은상문학관’건립과 생가복원, 테마공원을 조성하기로 하고 문화관광부에 10억 원을 신청한 것이 알려지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6년 동안 마산은 이문제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할 정도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끝내는 조두남문제와 맞물려 마산시장은 밀가루 투척에 곤욕을 치르고 조두남, 이은상을 반대하는 시민단체 회원들 여럿이 감옥으로 가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런 과정에서 이은상 문제는 마산뿐 만아니라 전국적 관심사가 되어 많은 국민들이 이은상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마산시와 시의회는 문학관의 이름을 ‘이은상’에서 ‘노산’으로 다시 ‘가고파’로 바꾸어가면서 이은상문학관을 성사시키려고 온갖 몸부림을 쳤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비난 여론이 들끓기만 했고 시민들의 여론을 제대로 수렴하라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기 만했다. 결국 마산시는 2003년 11월 예술, 언론, 시민단체, 학계인사들이 망라된 시민위원회(16명)를 구성해 여기서 관련자들의 의견과 시민여론을 청취하고 결론을 내도록했다. 위원회의 결론은 ‘이은상문학관’을 ‘마산문학관’으로 변경하라는 것이었고 시장은 이를 받아드린 것이다.
드디어 2005년 5월 20일, 마산시의회는 ‘마산문학관운영조례안’을 안건으로 상정하고 찬반토론을 거쳐 재석의원 27명 가운데 찬성 14표, 반대 13표로 가결되었다. 이렇게 꼭 6년 만에 끝난 이은상기념사업 논쟁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논쟁 내내 시의회는 기념사업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에겐 그때의 1표 차가 억울해서 이은상논쟁을 이념논쟁으로 몰아가려 하지만 당시 시의회 구성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일색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이 아직도 “좌파선동” 운운하는 것은 진실과 정의에 패배한 자들의 궤변일 따름이다.
이은상을 추앙하는 문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노산 선생은 국가의 검증을 받은 애국지사이며 위대한 민족시인 이다" "그는 대한민국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한민국건국포장을 수상하고, 작고했을 때 문화훈장 1등급 금관문화훈장 추서와 함께 국가가 지원하는 사회장으로 국립묘지 현충원에 안장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의 기념사업을 반대하고 마산시는 그의 기념사업을 포기했을까? 한마디로 그의 화려하고 찬란하고 이력과 명성 뒤에 숨겨진 진실은 권력에 빌붙어 곡학아세를 일삼는 독재부역자이며 불세출에 기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3.15의거를 “불합리, 불합법이 빚어내 불상사, 지성을 잃어버린 대모“로 규정했다.
조례개정 당시 황철곤 마산시장은 자신이 앞장서 추진해온 이은상기념사업을 사실상 폐기, 변경했고 이에 반발하는 시의원들에게 황 시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공적으로 추앙되는 인물은 도덕적, 역사적 흠결이 없어야 합니다. 이번 일은 지역의 시민사회가 성숙돼 가는 과정에서 역사적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불가피하고 우리는 그 현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더 이상의 논란으로 고인들의 명예가 훼손되지 않은 길이 무엇인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황시장의 이 말속에 모든 답이 다 들어 있다.
이제 더 이상 이은상을 두고 우리지역의 문화관광자원이니 문화콘텐츠니 하는 말은 하지마라. 그는 관광 상품으로서의 매력도 가치도 이미 상실했다. 이에 우리는 창원시가 꺼진 불씨를 다시 살려 대형화재를 일으키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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