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안면을 트게 된 모 개척 교회 목사는 나만 보면 교회에 나와 구원을 받으라고 성화였다. 구원 받기 싫다고 했더니 태평양 너머 있는 나라의 번성을 보라고 한다.
미국인들은 교회를 발이 닳도록 드나드는 덕분에 오늘날 떵떵거리고 사는 은혜를 입었단다. 자기 종교의 경쟁 상대가 그 정도라 생각했는지 설교의 단골메뉴에 뜬금없이 “김일성 미워”를 빼놓지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접시 바닥보다 더 얕은 사고로도 하나님 목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끄러운 대형 교회 목사만이 아니라 가난한 교회를 어렵사리 꾸려나가는 사람과도 말이 통하지 않을 줄은 순진하게도 몰랐다. 반기독교적이라고 욕을 들을지언정, 한국 교회의 지배적인 풍토가 저 목사의 인식 수준과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느껴지는 한심스러움과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다.
집단주의와 폐쇄성이 강한 한국 문화의 특성상 유독 종교더러 배타성을 가지지 말라고 한다면 무리한 주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신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닫혀 있다는 비판을 듣는 건 엄연한 현실임을 인정해야 한다. 인터넷에는 개신교와 관련한 뉴스가 뜰 때면 독설에 가까운 비판과 비아냥을 교회에 던지는 독자 의견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접시 바닥보다 얕은 사고
개중에는 기독교를 싸잡아 욕하는 글도 적지 않다. 특정 종교를 한 묶음으로 비난하는 의견이라고 해서 터무니없다고만 볼 일은 아니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가끔짓 궂게도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그런 글들을 훑어보러 들어갔다가 종교 권력에 상처 입은 사람들의 내면을 헤아려보기도 한다.
개신교 신자들에게서 크든 작든 느껴지는 배타성과 독선은 이 종교가 이 땅에 들어와 뿌리내린 역사와도 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업혀 들어온 개신교는 처음부터 지배 세력과 끈끈히 밀착하면서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다.
교회가 마을의 솟대와 서낭당을 미신으로 몰아 사라지게 하는 등 토착종교와의 전쟁에서, 나아가 전통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은 개신교 자체의 역량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제 및 친일파와의 타협, 해방 이후 우익 세력, 그리고 군사정권과의 결탁이야말로 오늘날 방방곡곡 시뻘건 십자가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게 한 원동력이다.
첨탑이 높아갈수록 교회는 구원에서 멀어지고 가난한 이의 곁을 떠났으며, 탐욕에 가까워지고 정치에 다가갔다. 오늘의 교회는 종교를 넘어 정치권력, 언론, 사학재단 등 지배 권력과 한 몸이 되어 수구 세력의 공고한 아성으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그러나 늘 가진 자의 장단에 춤을 춰온 개신교의 주류 권력에게도 위기는 있는 모양이다
유치한 반공궐기 대회
국민을 죄는 악법의 힘으로 갖은 호사와 영화를 누리던 그들만의 천국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보와 개혁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시대는 이들에겐 세상이 뒤집히는 말세이며 예수 재림이 멀지 않은 날이다.
최근엔 일개 방송사가 감히 교회의 과거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헐뜯는 마귀 짓도 서슴지 않았다. 막가는 세상을 회개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는 한국기독교 총연합회는 교인들을 있는 대로 호명하사 서울시청 앞 광장을 촘촘히 채워놓았다.
이름하여 ‘대한민국을 위한 비상구국기도회’. 나라가 멀쩡한 줄 알았는데 비상시국이라 하다니 교회의 안목은 역시 다른 모양이다. 국가보안법과 사립학교법을 죽이려는 악마의 손길이 있는데 어찌 교회 안에서 편히 기도문이나 외란 말인가.
세상은 변하고 있고 수구 세력의 저항도 갈수록 도를 더해갈 가능성이 높다. 국경일에 성조기를 흔들고, 구국을 한답시고 유치한 반공 궐기 대회나 벌이는 이들의 몰상식은 쉽게 사그라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뒤로 굴러가지 않을 테니 과거의 영화는 잊는 게 좋다.
오늘날 개신교의 문제는 자신들을 하나님의 목자가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로 보는 데 있다. 좀 더 낮은 곳으로 십자가가 내려지지 않는 한 심판은 바로 그들 자신에게 내려질 수 있음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기도나 바칠까.
* 경남도민일보는 언론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신문입니다. 기사게재일자 : 2004/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