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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자들은 먼저 이 기록을 탐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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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희망연대 댓글 0건 조회 973회 작성일 04-06-0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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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자들은 먼저 이 기록을 탐독하라
글쓴이:김소봉2004-06-02 09:27:00

위정자들은 먼저 이 기록을 탐독하라

김소봉(자유기고가) /




[김소봉 칼럼]고성출신 용장 최균(崔均)과 최강(崔堈) 형제 장군

임진왜란이 일어 난 그 해 10월.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막역한 벗이었던 위서 강백천에게 그리움을 담은 서신을 띄웠다. 내용은 의주로 파천한 선조를 배종한 강백천에게 임금과 벗의 안부를 묻고 진해 웅천 해전의 치열했던 격전의 고충과 함께 경상도 고성출신인 용장 최균(崔均)과 최강(崔堈) 두 형제 장군을 격찬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또 한 번 거론하지만 임진왜란은 충무공을 비롯한 일부 장수들의 승전을 제외하고는 명문거족과 양반들이 노예와 짐승처럼 착취하고 멸시했던 풀뿌리 민초들과 승려들이 손에 낫과 괭이 들고 나가 맨몸으로 싸워 이긴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육상의 전투에서는 일부 의병장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과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남해안의 수군을 제외하고 모든 전역에서 정규군이 적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최균과 최강 장군 격찬

선조 25년 5월 7일에 벌어졌던 옥포해전을 시발로 충무공께서 전사한 노량해전을 비롯한 10개의 큰 해전 가운데 유독 수륙양동 작전으로 값진 승리를 이끌어 낸 전투가 웅천대첩이다. 당시 왜구들은 울산과 진해 남문동에 왜성을 쌓고 그 성을 본거지로 경상도 전역에서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에 충무공은 의병장 최균과 최강장군에게 서찰을 보내 양동작전을 제의했고 전갈을 받은 두 분 장군이 제만춘 장군과 함께 웅천 부근에 있던 왜군의 본대를 공격하는 것을 시발로 충무공은 방답 첨사 김완을 필두로 4000여 명의 수군을 동원해 적의 수군을 공격해 10여 척의 왜적 전함을 격파했다. 또한 구응진, 구동, 구상동 장군까지 합세하고 승병들까지 나서 웅포 왼쪽 반도를 승병장 삼혜와 의병장 성응지가 맡았으며 일부 수군까지 가세하여 대승리를 엮어 냈으니 바로 창원과 진해의 고갯마루인 안민령 전투가 그것이다.

후일 조정이 장계를 받고 최강 장군을 승진시켜 가리포첨사(전남 완도)에 명하자 마지막 발악을 하며 남해안을 분탕질하는 적의 수군을 화공으로 섬멸했고 그 공으로 다시 순천부사에 발탁됐다.

최강 장군이 순천으로 부임한 때는 전쟁은 소강상태였으나 오랜 전화로 백성들은 초근목피에 의존하고 남정네가 모두 전쟁에서 죽거나 불구가 된 터라 고을은 불구자와 과부, 그리고 노약자뿐이었다. 장군이 그 참혹함을 보고 울며 맹세하기를 “내 백성이 굶주린다면 내 살과 피를 도려내서라도 먹여 살릴 것이다”라며 관곡을 털어 백성을 구휼하고 직접 쟁기와 지게를 지고 일손을 도왔으며 백성들과 더불어 모자라는 양식을 충당하기 위해 직접 노를 젓고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았다. 장군의 선정이 그와 같아 유독 순천에서는 굶어 죽은 백성들이 없었다고 전한다.

선조가 붕어하고 광해군이 등극해 포도대장에 명했으나 병을 핑계로 낙향하여 형인 최균장군과 함께 우애를 나누다가 갑인년(1614년)2월16일에 세상을 등지시니 구만묘동(고성 구만면)의 산자락 간좌(艮坐)에 안장했다. 형인 최균 장군도 조정이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리고 80세로 병진년(1616년)9월16일에 운명하자 고성 회화 당항포 산자락 자좌(子坐)에 안장했다. 사후에 두 분의 공을 높이 산 조정이 형인 균을 이조판서로 추증해 의민공, 아우인 강에게는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의숙공의 시호를 내렸으며 200년이 흐른 순조대왕 23년 계미년(1823년) 세자익위사익찬의 벼슬에 있던 풍산 류심찬 선생이 쌍충실기를 지어 바치며 두 분 장군의 의로운 혼백을 다시 위로했다.

애국과 희생 단골 메뉴

어디 그 뿐인가. 최강 장군이 죽자 가리포와 순천의 백성들이 떼로 몰려와 부모가 타계한 것처럼 애통망곡해 하며 장군의 묘 옆에 초막을 치고 3년을 시묘한 후 돌아갔으니 저 목민지관으로 이름난 왕조와 양일에게도 이런 기록은 없었다.

그 자식이 어버이를 위한다 해도 3년을 시묘한 예는 극히 드문 일로 백골과 뼈에 사무치는 은혜가 없었다면 어찌 이런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죽은 전직 관리를 위해 그것도 전라도의 백성이 멀고 먼 경상도까지 7백 리 길을 물어 찾아와 장군의 무덤 옆에 초막을 치고 기거하며 3년을 시묘한 일은 전무후무한 감동적인 휴머매니티로 역사에 남을 것이 분명하다.

곧 6·5 재·보궐 선거일이 다가온다. 선거 때 입만 열면 식단의 단골메뉴처럼 애국과 희생을 떠벌리고 뽑히면 간과 창자까지라도 꺼내줄 것처럼 거짓을 일삼는 일부 위정자들. 그리고 지역색으로 국민들을 서로 이간시켜 입신양명의 제물로 삼았던 정치인들. 그들에게 특히 이 두 분 장군의 얘기를 귀담아 듣도록 권하고 싶다. 또한 종교적인 이유로 국토방위를 기피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도.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애국과 봉사는 이런 것이며 그럴 때 지역색은 저절로 종식되고 태평성대를 구가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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