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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 들리는 제말 장군의 통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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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희망연대 댓글 0건 조회 1,010회 작성일 04-04-2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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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 들리는 제말 장군의 통곡
글쓴이:김소봉2004-04-26 09:55:00
지하에서 들리는 제말 장군의 통곡


김소봉(자유기기고가) /




영조대왕 정사년(1737년) 정월 열이렛날 밤.

경상도 성주목의 찰방인 정석유는 동헌 뒤뜰 지이헌에 올라 아직 만월의 티를 벗어나지 않은 달빛을 구경하다 깜짝 놀랐다.

갑자기 일진광풍이 불고 대숲이 자지러질 듯 흔들리면서 구척장신의 귀장 한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귀장은 정석유를 원망스레 쳐다보며 원통한 듯 가슴을 치고 부르짖었다.

“나는 경상도 고성 사람 ‘제말’이란 장수로 임진년 전투에 공이 커 조정이 나를 성주목사에 명했다. 내가 처음 모병 하여 웅천·김해·의령 전투에서 승리하지 않은 싸움이 없었으나 성주전투에서 적은 강하고 우리는 수가 적어 원통하게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성주전투서 아군 모두 전멸

정기룡 같은 사람은 세상에 위명이 높으나 필마단기로 적진에 뛰어든다면 내 용맹함과 견주지 못할 것이다.

그런 데도 전사에 누락되어 억울한 혼이 구천을 맴돌고 있으니 이 어찌 공평한 논공행상이라 할 것이냐? 그대는 나의 이 통분함을 밝혀주기 바라노라!”며 말을 마치고는 통곡하며 사라졌다.

이튿날 정석유는 목사 홍응몽에게 고했고 목사가 전관명부를 뒤져보니 과연 임진년에 제말 장군이 성주목사로 등재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경상감사 ‘정익하’에게 보고했다.

당시 정익하는 인사문제 때문에 조정에 직접 보고하지 못하고 칠원현감 어사적에게 공문을 보내 제말의 무덤을 찾아 만일 퇴락하였으면 수리, 개축하고 묘지기를 두어 제사를 받들 것을 명했다. 그러나 어사적이 장군의 무덤을 찾지 못해 그대로 방치되고 말았다.

하루는 어사적이 낮잠을 자는 데 꿈에 한 장수가 나타나 “나는 전 성주목사 제말로 조정이 내 전공을 추적해 세상에 알리려는데 어찌 태수 혼자 알지 못하느냐! 나는 다구리에 묻혀 있노라”고 꾸짖자 어사적은 놀라 일어났다.

즉시 수하사람을 거느리고 다구리(지금의 진동에서 수정으로 가는 중간 길목)에 나가 인근 야산을 수색해 장군의 유택을 찾았으나 후손이 끊겨 빈 벌집처럼 황량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어사적은 현의 재정으로 장군의 유택을 개·보수하고 비를 세운 다음 제향을 받들어 모시니 그 후로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장군이 전사한 지 200년이 흘러 정조 16년(1792년). 나라에서 공이 있으나 증거가 불충분해 그동안 누락된 공신들을 다시 추증하여 포상하려 할 때 제말 장군이 우선순위로 거론되자 대왕께서 예조에 “제말이 임진년 성주목사로 그 전공이 높았으나 전 군졸이 전멸하는 바람에 공신록에 기록되지 못했다. 강토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것이 모두 그 같은 충신열사들의 목숨 바친 호국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 제말에게 충장공(忠壯公)의 시호를 내리고 병조판서를 추증하라. 즉시 거행하여 그의 원혼을 달래주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 후 영남 유림들이 충장공의 조카인 제홍록 장군과 제락 장군을 함께 모시도록 윤허를 바라자 정조는 “제말이 전사한 곳이 성주며 아직도 혼백이 성주를 떠나지 못한다고 들었다. 다행히 전 목사 이사룡을 제사지내는 충렬사가 있으니 그곳에서 향사를 받들라. 짐이 직접 제문을 지어 그의 충의로운 원혼을 위로하리라” 는 하교가 있자 조정이 의논 끝에 당대의 석학이었던 이조판서 서유린이 비문의 글을 짓고, 호조참판 이윤형이 감수를 맡고, 병조판서 이병모가 글을 쓴 다음 진주 창렬사와 성주에 두 개의 비를 세워 만대에 제말 장군의 업적을 기리도록 했으니, 현재 하나는 성주군청 위 고개턱에 있고 하나는 논개 사당인 촉석루 바로 뒤켠에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다.

그 후 순조 대왕께서 선대왕 때의 기록을 뒤지다 제말 장군의 전공을 읽고는 감탄한 나머지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를 다시 내렸으니 이처럼 한 인물에게 두번씩 시호를 내린 일은 드문 일이었다.

장군의 비문에 새겨진 벼슬은 <충장공 충의공 효충복의적의 협력선무원종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 훈련원사 통훈대부 성주목사 성주진병마첨절제사 독용수성장>이란 긴 두루마리 같은 공훈으로 각인되어 있다.

운곡서원 보수 만전 기해야

경남도와 고성군 당국은 예산을 증액시켜 제말 장군을 모신 고성 대가면의 운곡서원을 청소년 충효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보수에 만전을 기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경남도 당국은 역사적 전공이나 기록도 전무한 말썽 많은 전제 장군의 초상을 철거하고 제말 장군처럼 사초에 빛난 우리 지역의 호국영령들을 추존하는 작업에 인색하지 말기를 바란다.

11년 전 우연히 고성 대가면을 지나다 운곡서원에 모셔진 제말이라는 장군에게 호기심이 생겨 경북 성주와 고성 진동을 누비고 국립도서관에서 여러 실록을 뒤져 장군에 대한 업적을 찾아내 글을 기고했고 이 인연으로 그 분의 후손인 제정구 전 의원과 깊은 친교를 나누기도 했다. 경상남도의 문화행정이 탁상행정 눈치행정에서 도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빨리 개선되길 다시 한 번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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