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하나. 나의 집은 진해인데 고등학교를 마산에서 졸업했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버스로 약50분 정도 걸렸습니다. 3년을 통학을 했습니다. 통학생이라는게 이런저런 이야기 거리가 한 두개쯤은 있게 마련입니다. '어쩌면' 일지도 모를 나의 첫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학교를 처음 가던 날 버스에서 예쁘장한 여학생을 보았습니다.(만난게 아니라 보았을 뿐입니다). 아직 수줍은 나이인지라 그렇게 말없이 지나쳤습니다. 그 여학생은 밑 동네에 살았습니다. 버스를 타려면 5분 정도 걸어서 가는데 그 동네를 지나 가야했습니다. 걷다 보면 그 여학생이 저만치 앞서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저 뒤에서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같은 버스를 탔습니다. 학교가 이웃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없이 3년이 지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학생을 만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만난다는 것이 적어도 이름정도는 아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신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이 되었습니다. 새벽 미사를 다녀오는 길에 동네에서 그 여학생, 아니 이제는 회사원이 된 여자를 보았습니다. 생 머리가 파마 머리로 변해 있었습니다. 파마 머리가 부끄러웠던지 그이는 고개를 숙이고 얼른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 후로는 그이를 본적이 없습니다.
첫사랑 둘. 신부가 된지 1년쯤에 '가톨릭 노동 청년회' 모임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회원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무려 두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나마 한 명은 비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뜨거웠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노동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는 '투사'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기 엄마들이 되어 버린 그들과 몇 배(?)로 늘어난 회원들과 끝나지 않는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첫사랑 셋. 92년도에 신부가 되어서 96년도에야 첫 주임으로 사목지에 오게 되었습니다. 억압의 긴 세월(?)을 보내며 그리던 사목지이니 얼마나 감개무량하였겠습니까? 부임 인사를 이렇게 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들과 첫사랑을 할 것입니다. 이 성당과 여러분은 본당 신부생활의 첫사랑입니다." 아직도 나는 첫사랑의 성당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직 식지 않는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울고, 웃고, 싸우고, 화해하며 사랑하고 있습니다.
첫사랑 넷. 96년도 초에 선배 신부님을 따라 서울 혜화동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사무실에 갔습니다. 몇 번 방송에서 보았던 유명한 신부님들과 낯선 신부님들, 머쓱한 기분으로 앉아 있던 나는 첫사랑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직 익지 않은 풋내 나는 사랑이지만 이젠 제법 사랑한다고 속으로 되 뇌일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출애급기 3장 15절)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히 잊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영원히 가슴속에 묻어 조금씩 태우면서 아파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처음 만난 그때처럼 설레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사랑한다는 것은 처음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