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상의 친독재 경력
3.15와 10.18의 도시 “민주성지 마산‘이 그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
● 이승만 80회 생일 송가 헌시 1955년 이승만의 80회 생일(3월 26일)에 '송가(頌歌)'라는 제목의 경축시를 헌사함 (이 겨레 위하시어 한 평생 바치시니/ 오늘에 백수홍안 늙다젊다 하오리까/ 팔순은 짧으오이다 오래도록 삽소서) -1955년 희망 4월호-
※80회 생일 불과 4개월 전인 1954년 11월 29일, 이승만은 대통령 종신집권을 위해 불법적으로 대통령 중임제를 폐지하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우리나라 헌정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의 하나로 흔히 ‘사사오입(반올림)개헌’이라한다.
● 60년 3.15정부통령 선거 유세 이승만=이순신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정하에서 치르게 된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종화, 김말봉 등과 문인유세단을 조직하여 전국 순회강연을 하면서 자유당 이승만, 이기붕 정부통령 후보를 지지. 독재자 이승만을 “이순신 장군 같은 분”이라며 구국의 위인이라 칭송함 -1960년 사상계 5월호-
● 3,15의거 비난, 마산시민 모독 60년 3.15부정선거에 저항하여 마산에서 일어난 3.15의거와 4.11민주행쟁에 대해 '무모한 흥분'으로,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로 마산시민을 비난하고 '불합리,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라고 모독하면서 시위가 확대되는 것을 '마산사람으로서 염려하며 마산시민들에게 자중하기를 바란다.'는 발언 -60년 4월 15일 조선일보-
● 기회주의자의 표본 4.19혁명이 성공하자 서울 수유리 4.19혁명 국립묘지의 4.19학생혁명 기념비에 4.19를 찬양하는 비문을 썼다.(기회주의자 표상)
● 공화당 창당선언문 작성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공화당을 창당할 때 창당선언문을 작성함, 이후 박정희가 통치 이데올로기로 이용한 성웅 이순신성역화 사업(박정희=이순신)에 지대한 공헌을 함.
● 박정희가 강탈한 장물 영남대 설립의 일등공신 대구 청구대 교수로 재직당시 박정희에게 대학재단 설립(영남대)을 강력히 권유하고 독립운동가 야청 최해청이 세운 청구대를 강탈하여 박정희에게 헌납하는 작업에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모의함-청구증언- ● 독재자에게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를 팔아먹은 반민족 시인 안중근의사숭모회 회장 이은상은 1979년 5월 21일자로 ‘박정희 대통령 각하’에게 보낸 ‘건의서’를 통해 ‘안중근 의사 탄신 1백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성역화 사업을 추진할 것을 제안하면서 “이것은 오직 각하께서만 명령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 “각하의 역사적 영단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직접 현장에서 설명을 드리고 하교를 받잡고자 합니다”라고 탄원했음. 1979년 9월 2일이 안중근의사 100주년 탄신일이었고, 불과 한 달 보름 뒤 부마항쟁이 일어났으며 곧이어 10.26사건으로 박정희 사망. 이순신 장군에 이어 안중권의사까지 박정희의 통치도구로 이용될 뻔했음.
● 쿠데타로 대통령이된 전두환에게 재빠르게 지지, 찬동하는 글을 헌사 전두환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후 장충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자 1980년 <정경문화> 9월호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에서 "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 무엇보다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 여론"이라는 글을 헌사하고 이듬해 4월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됨.
● 친일광신도를 덕망 높은 사회사업가로 칭송 일제로부터 애국옹이란 칭호를 받은 친일광신도 문명기(일본군 비행기 헌납운동 주도 등)의 비문(경북영덕)에 '축복받은 기업인으로 사회사업가“로 칭송하는 묘비문을 씀.
● 능수능란한 변신 문명기와 같은 영덕군에 새워진 3.1독립만세 기념탑에도 비문을 씀
● 독재부역의 대가로 받은 명예와 영광 5.16 민족상을 비롯해 국민훈장무궁화장. 금관문화훈장 등 훈, 포장을 받고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예술원종신회원 등 50여개의 사회단체장을 역임 했던 화려한 그의 경력은 대부분 독재협력에 따른 보상과 곡학아세로 얻은 지위임.
※ 이은상의 친일의혹 논쟁은 현재 잠복 중 이은상은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약 8개월간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한 사실로 독립유공자가 되었음(연루자 33명중 구속자 29명, 이중 이극로는 징역 6년, 최현배는 징역4년 이희승은 3년 6개월 정인승은 2년, 옥사 2명, 이은상 등 13명은 예심에서 기소유예로 석방, 기타 불기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이후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에게 제기된 친일의혹은 아직 확실한 증거 자료를 찾지 못해 친일을 단정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상태임(양측 모두 증언에 의한 기록만 남아있을 뿐, 본인 또한 생존당시 적극적인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았음) 10여 년 전, 만주제국 건국10주년(1943년)기념으로 만선학해사라는 곳에서 발행한 ‘반도사화와 낙토만주’에 글을 싣고 자신을 친일잡지인 ‘조광 주간’이라 밝힌 자료가 발견되어 이은상의 친일논쟁이 재점화 되었으나 이 자료만으로 그를 친일파로 단정 짓기 어렵지만 해방직전 그의 행적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었음.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이 등재되지 않았지만 친일의혹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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