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혁명과 김지태사장 그리고 정수장학회에 대한 우리의 입장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고 당시 이승만 자유당독재정권은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해 상상을 초월한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이에 분노한 마산시민들은 선거무효를 외치며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를 일으켰고, 역사는 이날의 마산시민 봉기를 3.15의거라고 부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3.15의거는 독재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중 전북 남원(호남)에서 경남 마산(영남)으로 유학 온 김주열이라는 학생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리고 3월 15일 밤이 지난 마산은 죽음과 공포의 도시로 변해 길에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3.15의거를 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몰아가고 마산시민들은 하루아침에 사상이 불순한 폭도가 되어 경찰과 반공청년단에 의해 무차별 폭행, 연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7일이 지난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이때 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바다위에 떠 오른 김주열 시신을 촬영한 부산일보 허종기자의 사진과 기사가 부산일보에 특종으로 보도되면서 이것이 외신을 통해 전 세계로 전송되어 이승만독재의 만행에 세계인들이 경악했다. 한편, 이날 김주열의 시신을 직접 목도한 마산시민들의 분노는 화산처럼 폭발해 3.15의거보다 훨씬 규모가 큰 4.11민주항쟁이 일어났다. 이 소식과 함께 마치 현장을 직접 보는 것 같은 생생한 사진을 통해 김주열의 참혹한 주검을 보고 격분한 국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면서, 시위는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마침내 4월혁명으로 이어졌다. 당시, 우리 국민들이 이승만 자유당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민권승리를 쟁취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 그때로부터 5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3.15, 4.19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허종기자의 김주열 사진이 반드시 등장한다. 이것을 보면 4월혁명에 그 사진 한 장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이 그러하듯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보다, 그것을 겉으로 드러나게 한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힘과 노력이 있기 마련이다. 부산일보에서 김지태사장이 바로 그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대선국면에서 최대의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른 정수장학회 논쟁을 지켜본 결과다. 즉, 4월혁명 당시 언론사 사주였던 그분의 소신과 언론정신이 신문지면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우리 사회의 수준이나 정치적 상항으로 보아 사주의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없었다면 그런 보도가 나가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쯤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하물며 지금 이 시대에도 언론사 사주의 언론관이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보도 내용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잘 알고 있기에 당대의 시대정신에 적극적으로 부응했던 김지태사장의 당당한 소신과 태도가 50년이 지난 지금 더욱 더욱 돋보인다.
4월혁명 이후 마산은 민주성지가 되었고 마산시민은 모두 4월혁명의 영웅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김주열기념사업회나 마산시민의 입장에서 너무 늦어 죄송스럽지만 이미 고인이 되신 분에게 감사의 정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우리는 오늘 그분을 대신한 유족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정수장학회 문제로 고인의 인격을 폄훼하고 모독하는 자들이 있지만, 오히려 그들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은 국민들로부터 호된 심판을 받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수장학회 문제는 유족들의 뜻대로 해결될 것으로 우리는 확신한다. 그것이 상식이고 정의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저희가 드리는 이 감사패가 유족 분들에게 작은 위로라도 되기를 바랍니다.” 2012년 11월 1일 사단법인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 3.15정신계승시민단체연대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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