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평전]의 일부입니다. 선구자 작사자 윤해영이가 속한 단체인'협화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널리 알려진 '협화회'에서 열심히 일한 윤해영을 독립운동가로 묘사한 조두남의 저의가 무엇일까? 생각 해 봅시다.
...............윤동주의 죽음에 무언가 심상찮은 비밀이 숨어 있으리라고 직감한 최초의 사람은 아 버지였다. 당시 주검을 찾으러 간 아버지는 가장 먼저 송몽규를 면회 했다. 그리고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몰골을 확인했고, 그것이 옥중 노 동의 결과라는 것을 알았다. 윤동주도 노동을 한 것은 틀림없었다. 그의 겨울 내복이 왼쪽만 닳아 있었던 것이다. 왼쪽 소매와 왼쪽 가 슴 부분만 유난히 닳아서 헝겊의 올이 풀어지고 잔구멍이 송송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윤동주가 맡은 일은 몸의 왼쪽 부분만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죽음을 설명할 수 없었다. 윤동주도 송몽규도 지극히 건강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때 가족이 추정한 사인은 먼 훗날 고노오 에이치(鴻農映二)라는 일 본인에 의해서 다시 제기되었다. 고노오 에이치는 1980년, 윤동주가 생체실험을 당했으며, 그 주사는 “당시 규슈제대에서 실험하고 있었 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 주사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 것이 다.
어쨌든 윤동주의 장례는 그런 의혹 속에서 치러졌다. 3월 초순 눈보 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그 리고 그 무덤의 흙을 미처 덮기도 전(3월 10일)에 다시 송몽규의 죽 음이 전해져 윤동주와 똑같은 절차를 밟았다.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를 한꺼번에 2명이나 잃는 슬픔 속에서 문익환은 4월에 첫 아이를 낳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협화회 (協和會) 일당은 ‘천황의 성덕’이니 ‘황국신민’이니 하는 따위의 말을 멋대로 지껄이고, 일본 사람의 조종으로 조선인·중국인·일본 인을 서로 친화시킨다는 미명하에 알량한 식민지정책을 선전하고 고무했다. 하필 <반달(일명 푸른 하늘 은하수)>의 작곡가요 아동문학 가인 광명여중 음악선생 윤극영이 간도협화회 회장을 맡아 그 선두 에 서서 친일 행적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