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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영의 친일 행각 조두남은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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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eekly경남 댓글 0건 조회 1,085회 작성일 03-06-0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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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영의 친일 행각 조두남은 몰랐을까?
글쓴이:Weekly경남2003-06-07 10:49:00

마산역앞의 선구자노래비. 
‘친일’도 상품이 되는 시대?

독립운동가의 기상과 꿈을 노래했다 하여 ‘제2의 애국가’로 대접받던 가곡이 있었다. 바로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의 가곡 <선구자>이다. 그러나 윤해영의 적극적인 반민족 행적과 친일작품이 드러났고, 작곡자인 조두남의 친일증언까지 나온 마당에 마산시는 그를 관광상품화한 ‘조두남기념관’의 개관을 강행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 때문에 학계와 시민단체가 발끈, 친일의혹은 물론 그의 모든 과거행적을 파헤치겠다고 벼르고 있다.

또한 독재부역 혐의로 지탄을 받고 있는 노산(이은상)문학관도 곧 착공될 예정이어서 이 논란은 더욱 격화될 전망이다.

마산시가 조두남기념관을 건립하면서 이미 친일작가로 판명된 <선구자>의 작사자 윤해영을 독립운동가로 왜곡한데 대해 각계의 비판이 일고 있는 가운데, 과연 조두남 선생이 생전에 윤해영의 친일행적을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일고 있다.

이같은 의문은 윤해영을 독립운동가로 표현한 내용이 전적으로 조두남 선생이 회고담 형식으로 생전에 쓴 글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두남 선생은 82년에 발간된 자신의 수상집 <그리움>(세광출판사)에서 윤해영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내 나이 21세 때-1933년, 기자 주) 목단강 주변의 어느 싸구려 여인숙에 묵고 있었다.…조그마한 키의 깡마른 체구에 낡은 외투…그는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윤씨의 눈빛은 침착하고 강렬했으며 깊은 신념과 의지가 담겨 있어서 아무리 보아도 장사하는 사람의 눈빛은 아니었다. 그후 해방이 될 때까지도 만주 벌판을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윤해영의 소식을 물었으나 그는 끝내 찾을 길이 없었다.…윤해영은 그토록 바랬던 해방이 된 지금 어느 차가운 땅 속에서 이 기쁨을 누릴까?”

이 내용대로라면 조두남 선생은 33년 중국 목단강시의 한 여인숙에서 <선구자>의 가사를 건네받은 후 최소한 82년 이전까지는 윤해영을 만나지도 못했고, 그가 친일을 했는지도 몰랐다는 말이 된다.

이같은 조두남 선생의 회고에 따라 윤해영은 ‘신비에 싸인 독립운동가’로 세간에 알려지게 된 것은 물론, <1895~1945 한국가요사>(박찬호, 현암사, 1992)와 <한국가요사 이야기>(김영준, 아름출판사, 1994) 등 나름대로 권위있는 음악사 저작에도 거의 그대로 기록된다.

그러나 90년과 91년 연변대 권철 교수와 인천대 오양호 교수 등에 의해 윤해영의 친일행적이 밝혀지면서 조두남 선생의 증언은 의심을 받기 시작한다. 급기야 각 언론에도 이같은 사실이 잇따라 보도되고, 93년에는 오양호·김삼웅 교수 등이 ‘친일작가 윤해영의 선구자 안부르기 운동’을 주창하면서 정부의 공식행사에서도 <선구자>가 연주되지 않는 수난을 당하게 된다. 93년 임시정부 선열 5위 영결식에서 국가보훈처가 공식조가로 선정된 <선구자>를 다른 노래로 바꿔버렸던 것이다.

해방때까지 같은지역 음악활동…‘친일동지’증언도

친일행적 발각우려에 거짓말 가능성 높아

그 후 94년 <한국일보>가 ‘두만강’이라는 기획연재기사를 통해 재차 윤해영의 친일혐의를 밝혔고, 95년에는 <대한매일>이 역시 ‘두만강 7백리’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김종화(82·당시 74세) 선생의 증언을 보도한다. 이어 96년에는 도하 전국의 각 언론이 중국 연길시에 생존해있는 원로음악가 김종화 선생의 증언에 따라 조두남 선생의 친일의혹까지 조심스럽게 거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느 언론사도 그의 친일의혹을 정면으로 파헤치진 못했다.

그러던 중 <대한매일> 친일문제 전문기자였던 정운현 기자(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가 99년 연재하던 ‘친일의 군상’ 시리즈에서 가곡 <선구자>의 문제를 상세하게 다룬다. 그는 이 기사에서 이스라엘의 바그너의 예를 들어 공식행사에서 <선구자>를 부르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쯤 되면 윤해영이 친일작가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게 된 셈이다. 그의 친일행적이 밝혀진 시기가 90년대 이후였으므로 84년 작고한 조두남 선생이 몰랐다는 가설도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이 가설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면 조두남 선생이 45년 해방 때까지 중국 목단강과 신안진 등에서 살았고, 해방 이후에야 서울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두남 선생은 적어도 윤해영과 같은 시기, 같은 무대에서 살았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특히 윤해영은 민주의 친일조직인 협화회 간부까지 지냈으며, 그 시절 수많은 친일시를 지으면서 <만주아리랑>이라는 노래까지 발표했으니, 음악활동까지 같이 했다는 점도 분명하다. 아무리 만주가 넓다 하되,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같은 음악활동을 하면서 친일조직의 간부까지 지낸 사람을 조두남 선생이 몰랐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두남 선생은 82년 “해방이 될 때까지도 만주 벌판을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윤해영의 소식을 물었으나 그는 끝내 찾을 길이 없었다”고 썼다. 이런 정황으로 보면 정말 그가 윤해영을 몰랐다는 추측보다 알면서도 거짓말을 했다는 쪽에 무게가 더 실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윤해영을 끝내 만나지 못했다고 썼을까. 그를 계속하여 ‘신비의 인물’로 남겨둠으로써 <선구자>의 역사적 정당성을 지키려 했던 것은 아닐까.

조두남 선생은 같은 책에서 “만주에 있던 동안 나는 많은 곡을 작곡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가 당시 작곡한 작품을 구체적으로 곡목까지 거론한 것은 몇 개 안된다. 나머지 ‘많은 곡’은 어떤 것들일까.

이런 의문에 대해 연변인민출판사 류연산 편집부장은 “조두남 선생이 거짓말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며 “윤해영의 친일이 알려지면 자신의 친일마저 알려질 것을 우려해 그를 신비의 인물로 남겨두려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김종화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조두남은 윤해영과도 42년 이후 해방 때까지 줄곧 음악활동을 함께 해왔고, 심지어 음악발표회도 함께 했을 뿐 아니라, 윤해영이 지은 친일시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현재로선 누구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평범한 말에 기대를 걸어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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