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말부터 해두어야 하겠다. 문제의 봉암수원지에 이른바 ‘마산 역사표지석’이라는 것을 세운 사람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우리의 생각과 주장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이런 사업을 대학의 특정 기관에 용역을 맞긴 줄 알았다면 그것이 과연 타당한 일이었는지 부터 문제삼았을 것이다.
따라서 유장근 관장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은 마산시와 경남대 박물관이 맺은 학술용역의 모든 계약내용과 그의 책임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를 확인한 이후에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며칠 사이에 일어난 몇 가지 뒷이야기를 남겨두고 싶어 이글을 쓴다.
희망연대 등산반이 우연히 발견하게 된 ‘마산 봉암수원지의 일본인 공적비’에 대한 이야기가 희망연대의 인터넷 홈페이지 호프뉴스에 기사로 올라간 그 시점까지는 경남대학교 박물관이 마산시로부터 학술용역을 받아 역사표지석을 설치했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은 사실이다. 그동안 친일청산 운동을 한답시고 나부댄 우리가 정작 우리가 사는 마산에서 벌어진 그 중대한 역사적인 사업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정말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마산시내 곳곳에 영원히 또 하나의 역사물로 남을 ‘마산 역사표지석’ 설치를 시민들에게 제대로 홍보하지 않은 관련부처에도 문제는 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날 오후 마산시에 이와 관련된 정보공개를 요청한 내용부터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우리가 마산시에 요구한 정보공개의 요구는 너무나 단순, 무식했다. “최근 마산시가 세운 이와 유사한 빗돌의 수와 그 설치비용이 얼마인가?”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날 희망연대 사무국장이 정보공개요청을 하러 시청민원실로 들어설 때, (헨드폰이 울려 받아보니)시청 수도과 직원들이 자기들도 인터넷에 뜬 희망연대의 기사를 보고 놀라(수원지 문제니까 당연히 자신들의 업무소관이라 생각하고) 직원이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까지 찍어 왔다면서 우리 시청에서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한 바 없고, 아마 희망연대가 생각한 것처럼 일본인 후손이 와서 살짝 만들어 놓고 간모양이니 이건 우리가 나서서라도 시에서 철거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는 우스운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하루가 지난 다음날 오후, 여기저기에서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용역을 받아 표지석 대상을 선정하고 빗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그 용역사업에 참여한 연구진들의 명단까지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평소 희망연대라는 단체의 정체성 때문인지 학계와는 유난히도 연이 닿지 않았던 아쉬움들이 그날은 정말 다행으로 다가왔다. 고고한 학계와 유식한 학자들과는 연도 없고, 그러니 그들에 대한 정보 또한 아무것도 없으니 특별한 편견도, 이해관계도 있을 리 없기에 우리의 주장과 행보에 전혀 망설임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의외의 인물 두 분의 이름이 우리의 시선을 확 끌어 당겼다. 한 분은 시민운동을 하는 분이고, 또 한분은 언론계에 몸담고 있는 분이었다. 그 명단을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기자 한명이 우리 사무실로 들어와 시민운동을 하는 그분은 표지석을 디자인만 한 것으로 자기가 방금 확인 했다고 말했다. 나 또한 솔직히 그렇게 믿고 싶었고, 현재 그분의 생업인 직업으로 보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맘 편히 먹기로 했다. 취재를 나온 그 기자가 자리를 떠나자마자 나머지 한분이 근무하는 사무실에 전화를 했지만 이미 퇴근을 한 후라 통화를 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낮선 손님 두 분이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 중 한 사람이 자신을 경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김원규라고 소개했다. 나머지 한분은 자신은 그냥 친구 따라왔다고만 했다 김원규 연구원은 ‘2003년 마산역사표지석 설치 학술 용역서’ 라는 책자를 내밀며 희망연대가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긴 설명을 했다. 그러나 그의 해명은 나를 오히려 더 헷갈리게 했다. 나는 이제 수원지 문제를 넘어 용역보고서에 나온 24곳의 역사표지석의 대상물에 대한 선정기준의 애매모호하고 혼돈스러운 점과 선정된 역사물들과 유사하거나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역사물이 대상에서 빠진 이유와 형평성 등에 대해 계속 의문을 제기했다. 논쟁이 길어지면서 뜨겁게 달아오르자 같이 왔던 친구가 김연구원의 등을 떠밀다 시피 하여 사무실을 나가면서 나에게 아주 의미 있는 몇 마디 말을 하고 갔지만 불필요한 오해들이 생길 것 같아 여기에서는 밝히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아무튼 해방된 지 60년이 다된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한 친일청산은 우리민족사의 최대 과제로 남아 앞으로도 계속 국민들과 정치권의 뜨거운 화두가 될 것이 뻔 한 일이다. 그리고 불과 5년 전(1999년), 마산시가 개항 100주년을 앞두고 “외세의 강압에 의한 강제개항이다”. “아니다 자주적 개항이다” 하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져 결국은 개항100주년 기념사업이 본래보다 많이 축소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의 근현대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산시민들의 합의나 정서적 동의 없이 몇몇 학자들이 모여 특정한 역사물들을 자신들의 학문적 경향이나 기준으로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는 행위 자체가 원천적으로 말썽의 불러일으키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 사업을 맡았다면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하나, 일제시대 일본헌병분견대 건물을 역사의 유적지로 그 현장에 표지석을 세운 것은 정말 탁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건물은 “오욕의 역사도 역사”라는 차원을 넘어 해방이후에도 그 건물은 오랫동안 방첩대(보안사의 전신)가 주인 노릇을 했고 언제부터 인가는 3.1공사(정보부의 분소?)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가 지금은 수구보수단체들의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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