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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보(萬人譜)’가 기록한 박종표와 김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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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마이뉴스 댓글 0건 조회 1,300회 작성일 09-03-20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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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보(萬人譜)’가 기록한 박종표와 김주열
글쓴이:오마이뉴스2009-03-20 18:54:23
‘만인보(萬人譜)’가 기록한 박종표와 김주열

2009/03/19 19:35 정운현




고은(高銀) 시인 잘 아시죠?
그는 우선 다작으로 유명합니다.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그간 140여 권의 저서를 냈다고 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정력입니다.

그의 또다른 ‘특허상표’ 가운데 하나는 ‘만인보(萬人譜)’라는 연작시입니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만났던 인물들을 실명(實名)으로 다뤄오고 있습니다. ‘만인보’는 ‘시로 쓴 인물사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2007년 말 26권이 간행됐고, 총 30권을 발행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친일 헌병’ 박종표 얘기를 하면서 고은의 ‘만인보’를 꺼낸 건 바로 이 ‘만인보’ 속에 박종표를 주제로 쓴 시가 포함돼 있으며, 아울러 ‘3.15 마산의거’ 때 비참하게 숨진 김주열 열사 편도 있습니다.

저같은 사람이 쓰는 백 마디 글보다 고은 시인의 시 한 편이 외려 호소력이 있기도 할뿐더러 이번 기회에 박종표 관련 내용을 한데 묶어서 정리해놓고 넘어갈까 합니다.

참고로, 고은 시인은 3.15 마산의거 관련, 이 두 사람 이외에도 김영길(당시 18세, 4.11일 2차 시위 때 총 맞고 사망), ‘구두딱이’ 오성원(당시 20세, 3.15일 1차 시위 때 총 맞고 사망), 노원자(당시 18세, 마산 제일여고 재학생으로 총학생회장), 신 형사(시위자들에게 북한 공산당의 사주를 받았다고 거짓자백을 강요한 형사) 등을 다룬 시도 있습니다.

그럼, 박종표 김주열 두 사람과 관련한 ‘작품’을 보시죠.



4.19혁명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은 박종표(사진 중 X표)와 당시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 박 종 표

꼭 다문 보랏빛 입술 살쾡이눈 그리고 빼갈 네 도꾸리
1미터 60의 낮은 키
일본 헌병 오장(伍長) 아라이(新正) 앞잡이 박종표
일제 말 동포 고문 및 고문치사 수십 건
해방 이후
마산경찰서 경비 주임 박종표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마산시위

학생 김주열이 얼굴에 최루탄 박혀 즉사했다
경찰서장 손석래의 지시로
그가 나서서
그 시체에
돌 여섯 개 매달아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앞바다에 던져넣었다 가래침 탁 뱉었다

그 시체가 떠오를 줄이야
바다 밑 물속에 깊이깊이 가라앉았다가
매단 돌덩이들 빠져나가
시체가 떠오를 줄이야
하필이면

홍합을 잡던 노인의 눈에 발견될 줄이야

소스라쳤다
소스라쳤다

쇠갈퀴 끌어올렸다
낙배에 실었다
부둣가에 내려놓았다

죽은 고기가 아니라 죽은 사람이었다
김주열이었다
김주열이었다

김주열 시체가 떠올라 4월혁명으로 내달렸다

박종표
그는 이승만의 끝
그 자신의 끝이었다

대구교도소 형장
일제시대 이승만 시대의 끝이 그의 끝이었다


* 일제하 헌병보(補) 출신인 박종표(朴鍾杓)는 1960년 ‘3.15부정선거’ 당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으로, 3월 15일 선거 당일 밤 1차 시위 때 마산시청 앞에서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발포를 주도하였다. 그는 또 시위 현장에서 즉사한 김주열 군의 시신을 다음날 새벽 찝차에 싣고 가 돌을 매달아 마산 앞바다에 유기한 장본인이다.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박종표는 이후 4.19혁명재판소에서 최루탄을 발사하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유기한 사실을 자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 다시 시신 유기만 인정하고 최루탄 발사는 부인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고 한다. (혁명재판소는 1961년 12월 15일 ‘마산발포사건’ 상소심 공판을 열고 박종표 등 5명에 대해 상소를 기각하고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박종표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동아일보> 1961.12.15)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현재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근 한 달만에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군의 처참함 모습

- 김 주 열

마산 3월의거 한 돌이 지나간다
세상은 잠 이룰 밤이 없었다
공포였다
불안이었다
다음날 물가는 또 뛰었다
1960년 4월 11일 오전
이런 시절에도
중앙부두 물 위에 낚시꾼이 있었다

낚시꾼 눈이 커졌다
벌떡 일어섰다 걸려든 물건을 보았다
시체
썩은 시체다

송장이다
송장이다
하고 외쳤다

눈에서 뒷머리 쪽으로
20센티 쇳토막이 박혀 있었다

하나둘 모였다
하나둘 모였다
어느새
천 명이 모였다
살인선거 물리쳐라
시체 인도하라

3월의거가
4월의거로 불붙었다
4월 12일
만 명이 모였다

또 만 명이 모였다 나아갔다
마산시청
자유당 마산시장
국민회 지부
서울신문 지사에 돌을 던졌다

야당이다가 여당으로 돌아선
국회의원 집
시의원 집
사장의 집
우체국
소방서
어용신문 서울신문사
마산형무소에 돌을 던졌다

4월 13일 다시 궐기하였다

마산상고 합격자 김주열이
경찰에게 타살된 3월
타살되어
아무도 몰래 물에 던져진 뒤
그 주검
가라앉았다가
그 주검에 매단 돌 풀어져
떠오른 뒤
거기서 4월혁명은 시작되었다

하나의 죽음이
혁명의 꼭지에 솟아올랐다
뜨거운 날들이 이어졌다 목이 탔다

이제 마산은 전국 방방곡곡이었다


* 김주열(金朱烈) 군은 당시 17세로, 마산상고 1학년이었다. 김 군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가 자행된 3월 15일 밤 마산시청 앞 시위에 참가했다가 얼굴에 최루탄을 맞고 현장에서 숨졌다. 경찰은 그 처참한 모습을 숨기려고 시신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유기함으로써 그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러다가 근 한 달만인 4월 11일 김주열 군의 시신이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분노하여 마침내 2차 시위를 일으키게 된다. 이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의 가두시위로 확산됐고, 이는 마침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1999년 김주열추모사업회가 결성돼 다양한 추모사업을 전개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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