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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남의 친일과 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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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류연산 댓글 0건 조회 662회 작성일 03-06-06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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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남의 친일과 반공
글쓴이:류연산2003-06-06 13:36:00
유연산의 일제시대 인물발굴
조두남, 유치환, 한찬숙의 친일과 반공
류연산    
친일을 한 조두남, 유치환 등 문화계 인사들이 해방 후에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반공’이라는 든든한 방패 뒤에 숨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한국의 친구로부터 마산에 조두남기념관이 섰다는 충격적인 메일을 받았다. 참으로 대단한 한국이다 . 작고하신 중국 조선족 문단의 대부 김학철 선생님의 말씀을 빌린다면 “이 세상이 왜 이리도 뒤틀리고 배틀렸는지, 우렁이 속 같은지, 암만해도 모르겠다.”(김학철 저, 『사또님 말씀이야 늘 옳습지』, 요녕민족출판사, 2002년 9월, 525쪽)

너무도 놀라워서 이희승 편저로 된 『한국국어대사전』을 펼쳐보니 기념관이란 ‘어떤 뜻 깊은 일이나 위인 등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집’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조두남기념관은 조두남을 후세에 영원히 회고시키기 위한 정신적인 대상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다시 인터넷 야후에 들어가 ‘백과사전’에서 조두남을 두드리니 이렇게 되어 있다.

“작곡가 조두남은 6·25전쟁 후 마산에 정착, 피아노 교육에 주력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청년기에는 주로 서정적인 우국의 노래를, 장년기에는 민족교육의 장단과 가락이 어우러진 민족주의적인 노래를 많이 작곡하였다.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 마산지부 초대지부장을 역임했다.”

한국 음악의 발전과 지역사회 발전에 문화인으로 공헌한 바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마음 속에서 조두남은 노래 「선구자」와 직결된다. 두 번째 한국의 국가(國歌)나 다름없는 노래, 그 비장한 곡조로서 한국인의 마음을 불태운 작곡가 조두남을 기리는 기념관을 마산이 아닌 서울에 세운들 어떠하랴!


친일파를 독립운동가로 조작한 조두남


하지만 필자는 지난해 『말』 11월호에서 「선구자」란 노래의 실상을 공개한 바 있다. 「선구자」는 없었으며 그것은 「용정의 노래」를 개작한 데 불과하다고 했다. 물론 가사에 한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용정의 노래」나 「선구자」나 곡은 하나, 그러므로 작곡가로서 조두남의 작품은 그대로 살아 있다는 말로 이해해도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 조두남, 윤해영의 과거사를 증명한 중국 조선족 음악가 김종화 선생
그러나 그것은 빗나간 생각이다. 노래에서 곡은 형식이고 가사는 핵이다. 「선구자」의 비장한 가사가 뒷받침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곡이 지금보다 천만 배 더 멋있다고 하더라도 5천만 한국인을 공감시킬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또 조두남 선생이 수상집 『선구자』에서 말했듯이 전설 같은 창작 경위가 없었다면 민족 전체를 울릴 수 있었겠는가?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만주국 일제의 주구단체 협화회의 충실한 일꾼이었고 친일파 문인이었던 작사자 윤해영이 작사한 「용정의 노래」를 불러 보자. 「선구자」와 같은 그러한 감동이 올 것인가? 천만에 말씀, 그것은 한 편의 서정적인 애수의 노래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조두남 역시 재능이 있는 작곡가에 멈출 것이다. 그 다음 조두남이 말한 대로 독립운동가였을 윤해영을 떠올리면서 1932년 일제통치의 암흑기 용정에서 애창되었다는 「선구자」를 불러보자. 가사의 비장함과 곡조의 장엄함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불타오르는 가슴 한복판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같은 조두남의 형상이 떠오른다.
잠시 숨을 돌리고 진실로 돌아가자. 평범한 애수의 노래를 비장한 애국가로, 친일파 문인을 독립운동가로 조작한 조두남을 그려보자. 그리고 그 옆에 조두남기념관을 나란히 세워보자.

순간 그대는 허탈감을 느낄 것이다. 우롱당한 억울함을 달랠 길이 없을 것이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수십 년을, 한두 사람도 아니고 모든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사기 중에서 이보다 더 큰 사기가 또 있을 것인가?

‘백과사전’에서도 조두남은 “평양숭실학교에서 수학한 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용정 등지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고 운운하고 있다. 김종화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조두남이 1942년 겨울 손풍금수로 유랑극단을 따라 신안진으로 왔다고 하며, 그가 만주에 남게 된 것은 약침쟁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전 해석에 따라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라고 한다면 당시 일제의 약침단속을 피해 왔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독립운동가도 아니며 오히려 건강을 회복한 후 다시 국내로 들어가 친일가극을 창작해서 공연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항일군과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던 유치환


하긴 당시 만주에 왔던 문인들은 대개 자기의 한 단락 역사를 말할라치면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라는 상투적인 어구를 자기의 역사에 대한 금상첨화로 착각하고 첨가하기를 즐기는가 보다. ‘백과사전’에서는 유치환에 대해서도 “1940년에는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만주로 이주”라고 했다. 이런 경위를 ‘가랑잎으로 얼굴을 막고 따웅’한다고 한다.

만주 역시 조선과 똑같은 일제의 식민지, 그렇다면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다시 일제의 압제 속으로 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조선에서 일제의 압제를 받은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마치 애국자인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려고 한 수고일 뿐으로 그들이 만주에서 해놓은 일을 보면 제 얼굴에 침 뱉기에 불과하다. 조두남이 친일가극을 공연하고 다녔다면 유치환은 시인으로서의 대표작 『수(首)』를 발표하여 항일에 대한 일제의 압제를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유치환은 『수』에서 이렇게 읊었다.

“…이 적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있나니/ …너희 죽어 율(律)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여기에서 비적은 항일군이다. 유치환은 항일군의 머리를 효수함을 당연지사로 받아들이면서 ‘네가 죽지 않으면 나의 삶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항일군과 자신은 한 하늘 아래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고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의 압제를 피해”왔다는 사람이 “일제의 압제”를 칭송한 친일 흔적을 보면서 우리는 시인의 가여운 인생을 슬퍼한다.

이쯤 글을 쓰고 나니 나는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된다. 누군가는 “이 세상에 털어서 먼지가 안 나는 사람이 있느냐?”고 질문을 해오며, 또다른 누군가는 “그 당시 팬티 솔기에 서캐가 없고 이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나오라!”고 대성질호를 하기도 한다.

지난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사료전집』 제6권 『친일문학편』을 보면 당시 만주에서 펜을 놀린 사람 치고 먼지가 안 나는 사람이 없고 서캐와 이가 없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무려 30여 명의 문인들이 쓴 소설, 시, 수필, 희곡 등을 수록했는데 한국사에서 쟁쟁한 사람만 꼽더라도 안수길, 박영준, 현경준, 한찬숙, 유치환, 윤해영 등을 들 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도 각각이라 먼지도 먼지 나름이다. 그리고 팬티를 보면 서캐만 있는 사람도 있고 이와 서캐가 안거낙업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겠다. 박영준, 유치환, 윤해영은 이미 말한 바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현경준, 한찬숙을 보기로 한다.

현경준의 장편소설 『돌아오는 인생』과 중편소설 『마음의 금선』에 대해서 친일이냐 아니냐 하고 학자들 간에 줄다리기가 한창이지만 역시 낙토사상을 고취한 국책문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한찬숙 여사는 치사할 정도로 『취직(就職)』에서 일제에 아부하고 있다. 조선족 문학평론가 최삼룡 선생은 이렇게 썼다.

“소설 『취직』은 원래 황해도 도청에서 농업기사로 있던 김동수(金東洙)가 면직을 당하고 간도 땅 연길에 와서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중 연길일본인민회장 M씨 부인의 호감에 의해 그 집 인분을 푼 이야기다. 작품의 주인공은 완전히 민족 얼을 상실한 인간이다. 그는 일본 사람의 인분 치는 노릇을 자원해서 달갑고 깨끗하게 해내며 심지어는 자기의 돈을 써가면서 못을 사다가 일본인 집의 문을 수리해 주고 어린아이의 장난감을 수리해 주고 그 보답으로 M씨 부인으로부터 돈 10원을 받고 감지덕지하며 즐겁고 반갑고 신성한 감정에 잠긴다.

이렇듯 동수처럼 일본 사람에 의지하고 일본 사람에 충성하기만 하면 취직하지 않아도 취직한 거나 마찬가지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의 제목이 『취직』이다.”(최삼룡 저, 『해방 전 중국조선인문학에서의 친일과 친일성향에 대하여』,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사료전집』 제6권 24쪽, 연변인민출판사, 2002년 5월 )


© 이른바 비적으로 불린 항일연군 제2군 제6사의 장병들


여기에서 나는 또 분명히 듣는다. 누군가는 “그 당시 문학을 하려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라고 하고 누군가는 “그렇게라도 해서 우리의 한글문학을 지켜왔다는 것만 해도 공로부에 기록할 만하다!” 라고 긍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과 동시대에 한글문학을 창작해온 최서해, 강경애의 경위를 보면 꼭 친일문학 외길만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최서해한테서 친일문학이 당할 말인가? 강경애한테서 역시 친일문학이 당할 말인가?

그리고 한글로 ‘낙토만주 오족협화 사상’을 고취하여 동포들로 하여금 일제의 침략에 동조하게 하는 작용을 했다면 그러한 문학은 분명 역사의 반동일 것이다. 그렇다면 되묻노니, 그러한 반동문학의 존재가치는 무엇일까?

그런데 ‘백과사전’을 보면 안수길이나 유치환이나 모두 그러한 작품들을 스스럼없이 자기의 대표작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나 가장 당당한 이유는 ‘반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문학자냐 카멜레온이냐


친일파들한테는 광복 후 중국이나 북한의 정치는 학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광복이 나자 공산정권의 학정을 피해 월남했다”는 표현으로 사전의 해석을 바꾸는 것이 적합할 줄 안다. 그들한테는 이승만 통치나 박정희 통치가 은혜였다. 따사로운 햇볕과 같은 그 정치의 품 속에서 친일세력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팬티를 벗고 서캐며 이를 잡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어떤 이는 루쉰의 ‘아Q’처럼 이빨로 물어 죽이고 통째로 삼키기도 하고 어떤 이는 연변의 김학철 선생님의 감옥 동창처럼 해바라기씨 까듯 이의 피는 빨아먹고 껍데기는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뭇사람들한테 팬티를 들어 보이면서 “나는 친일을 한 적이 없다. 다만 반공을 했을 뿐이다”라고 소리소리 치면서 벌거벗고 염치도 없이 반공용사로 탈바꿈을 했던 것이다. 카멜레온!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경우 반공은 친일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반공은 친일파들의 출세의 탄탄대로였다. 이에 더해 한국의 반공은 매국매족의 온상이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생전에 김학철 선생님은 미당 서정주를 논하면서 일제시기, 자유당 시기, 1980년대 신군부 시절, 전 생애를 거쳐 오욕의 행적을 가진 인물임에도 이른바 한국의 석학들이 그의 시를 그것들을 넘어설 만큼 충분히 위대하다고 평하는 것을 반박하여 “썩은 넋에서도 풍경소리는 울리는가?”(김학철 저, 『사또님 말씀이야 늘 옳습지』, 요녕민족출판사, 2002년 9월, 425쪽)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민족의 질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지 않는 문학이란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런 무의미한 문학에다는 정력을 허비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자 신조다.”(김학철 저, 『나의 길』에서)

이 같은 문학정신의 소유자이신 김학철 선생님께서 오늘 생존해 계신다면, 그리고 마산에 조두남의 기념관이 섰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면 어떤 질문을 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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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류연산 : 연변대학과 광주 중산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연변인민출판사 종합편집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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