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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친일이냐 아니냐....기념사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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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마이뉴스 댓글 0건 조회 1,510회 작성일 08-01-02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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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친일이냐 아니냐....기념사업은?
글쓴이:오마이뉴스2008-01-02 17:25:23
29일 '청마 유치환의 친일 논란에 대한 학술토론회' 열려
btn_ntrans.gifbtn_nprint.gifbtn_nsize.gifbtn_nblog.gificon_artman.gif윤성효 (cj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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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 유치환의 친일 논란에 대한 학술토론회”가 29일 오후 경남 통영 소재 경상대 해양과학대학 강당에서 열렸다.
ⓒ 윤성효
icon_tag.gif유치환

유치환(1908~1976, 청마)은 친일행위를 했나 안했나. 유치환은 친일행위를 했더라도 기념사업을 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

 

“청마 유치환의 친일 논란에 대한 학술토론회”가 통영시·통영시의회의 주최와 한산신문·통영신문의 주관으로 29일 오후 통영 소재 경상대 해약과학대학 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토론회는 이상옥 창신대 교수의 사회로 열렸다. 유치환은 친일이 아니라거나 친일이라도 괜찮다고 하는 측에서는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와 홍정선 인하대 교수, 소설가 복거일씨가 나왔다. 유치환은 친일이라고 하는 측에서는 박태일 경남대 교수와 김재용 원광대 교수,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나와 각각 주장을 펼쳤다.

 

통영문협·통영예총은 내년에 “깃발축제”라는 이름으로 ‘유치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을 연다. 통영시는 이 사업에 1억원을 지원하는데, 최근 통영시의회는 이를 승인했다. 유치환의 친일행위에 대해 계속해서 논란이 일자 기념사업을 앞두고 학술토론회가 열린 것.

 

유치환이 쓴 시 “수”와 “북두성” “전야” 등을 놓고 친일성이 제기되어 왔다. 박태일 경남대 교수는 지난 10월 한국어문학회 학술발표회 때 “청마 유치환의 북방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박 교수는 유치환이 만주국에 머물면서 만선일보(1942년 2월 6일자)에 게재한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제목의 수필을 찾아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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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n_rcm_s.gif btn_blog_s.gif btn_detail_s.gif29일 오후 경상대 해양과학대학 강당에서 열린 유치환 학술토론회에서 복거일씨와 홍정선 교수, 김열규 명예교수는 “유치환은 친일이 아니거나 친일이라도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에서 발제했다. ⓒ 윤성효 icon_tag.gif유치환

"이름 빌려서 한 게 아니다"-"훌륭한 것 깔아뭉개서는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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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일 경남대 교수.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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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일 : 박 교수는 “청마 유치환의 북방시 연구”라는 제목의 발제를 통해 유치환이 일제시대 때 통영을 떠나 만주로 가게 된 배경과 만주국에서의 활동, 부왜시문을 발표한 것에 대해 설명했다.

 

박 교수는 “본인은 좌파문학인 연구가가 아니라 경남부산지역 문학 연구가다. 국가주의체제 때 소홀하게 다루어진 문학가들을 연구하고 있다”며 “2002년 경남지역의 총괄적인 부왜(친일) 문학인 40여명을 연구해서 공개한 적이 있다. 김정한 이원수 등을 모두 언급하면서 부왜작품이 있거나 혐의가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김정한과 이원수에 대한 글을 썼고 올해 유치환에 대한 글을 썼다”고 설명.

 

그는 “유치환은 흔히 말하는 ‘지사적 도피’가 아니었고, 그런 차원에서 부왜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면서 “시 ‘전야’ ‘북두성’ ‘수’에 대해 분석해서 발표했고, ‘대동아 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만선일보 게재)라는 수필을 대해 지적했다”고 밝혔다.

 

일부에서 ‘사실 조작설’을 제기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박 교수는 “만선일보는 마이크로필름으로 연세대 도서관과 일본 와세다대학에 있다”면서 “사실을 조작하지도 않았다. 만선일보 편집실에서 청마 이름을 도용해 섰다고 하는데, 당시 청마는 34살이며 풋내기 문인이다. 그의 이름을 빌려서 할 수 없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논문을 학회에서 발표한 뒤 학자 3명이 평가서를 보내 왔는데, 모두 학술지에 게재해도 좋다는 평가를 해왔다”면서 “한 심사위원은 ‘학문적 엄격성에 비춘다면 해석은 매우 의미있는 일로 보인다’고 했다”고 소개했다.

 

박 교수는 발제문을 통해 “유치환은 급작스레 고향을 떠나 만주국에 머문 여섯 해 동안 ‘개척․협화’의 이념, ‘대동아공영’의 이상을 그린 다섯 편의 부왜시문을 남겼다”면서 “이글로 말미암아 그의 북방시에 대한 밑그림은 얼추 그려진 셈”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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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선 인하대 교수.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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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선 : “청마 유치환을 향한 친일의혹, 그 문제점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발제한 홍정선 교수는 유치환의 친일 의혹을 반박했다. 그는 박태일 경남대 교수가 발표한 “청마 유치환의 북방시 연구”라는 논문에 대해 견해를 밝혔다.

 

홍 교수는 “박태일은 청마의 만주행을 개인적 사정에 따른, 일종의 파렴치한 ‘도주형 출향’인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다”면서 “이는 친일문제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 박태일은 엄청난 양의 각주를 붙여가며 친일행위의 서곡처럼 기술하고 있다”고 설명.

 

그는 “청마의 만주행에 시대적 문제가 더 크게 작용했는지 개인적인 사유가더 크게 작용했는지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면서 “그것은 우리 인간의 삶에 종종 개인적인 문제와 시대적인 문제가 뒤섞여 있고 청마의 시대는 더욱 그러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유치환의 시 “수”와 “북두성” “전야” 등에 대한 친일의혹도 부당하다고 홍 교수는 설명. 그는 “시에 나오는 ‘비적’은 혹시 망명한 항일 독립군일지도 모른다고 하나 말 그대로 ‘비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또 홍 교수는 이태준․안수길과 비교할 때 친일에 대해 이중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설명. 그는 “청마가 인격적으로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이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세상에 흠 없는 영혼이 어디 있나. 그러나 사소한 흠을 문제 삼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더 훌륭한 많은 것들을 깔아뭉개거나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일은 비극”이라고 밝혔다.

 

"일제말 문학에 대한 연구 소홀"-"흠결이 있다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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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용 원광대 교수.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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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용 : 김재용 교수는 “일제 말기 문학을 깊이 있게 연구한 학자는 임종국 선생뿐이라 할 수 있고 다른 분들은 깊이 있게 연구하지 못했다. 일제 문학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무지함이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일제 말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다. 연구해 보니 협력한 사람보다 협력하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고 하는데, 연구해 보면 강요에 의해 쓴 사람은 정지용이나 이용악 등 부분적인 판단 착오나 굴복 등에 의해 한 편 정도 쓰고 만다. 그런데 자기해방적인 자발성을 가진 문인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경각스럽게도 유치환을 만나게 되었다. 통영이 고향이다. 어릴 때 유치환의 시를 보면서 시를 배웠다. 유치환의 친일성을 알게 되면서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스스로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했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당시 일제말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없었기에, 나만 눈 감으면 된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 생각을 잠재웠던 것은 학자적인 마음에서다. 이런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어떻게 학문을 할 수 있겠나. 그래서 2003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설명.

 

김 교수는 “유치환의 친일협력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발제문을 통해, “일제말 친일협력의 전체적인 상을 고려할 때 유치환은 분명 친일협력을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유치환의 친일 흔적들을 애써 외면하고서는 유치환 연구가 한발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며 “하지만 이런 규정은 한국근대시문학사에 그가 갖는 공을 무화시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유치환 시의 공과를 학술적으로 정확하게 따지고 그 위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유치환이 쓴 시 ‘전야’라는 작품을 보면 ‘학병 독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북두성’은 영락없는 아시아 해방을 바라보는 시다. 이런 담론은 그 당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당시 문학 연구를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 당시 문학을 연구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아니라고 할 수 있나. 그것은 학자적인 도리가 아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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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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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열규 : 김열규 교수는 “시 읽기의 원론에 비추어 본 청마 문학 논의의 현황”이란 제목의 발제문을 발표했다. 그는 “청마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적은 없고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자리에 나왔다”면서 “원론적인 말만 하겠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만선일보에 쓴 유치환의 글을 보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일제시대 학교에 다녔다. 아침마다 동방을 향해서 요배를 했다. 동방은 일본 천황이 있는 곳이다. 그 당시가 떠올라서 자신이 부끄러웠다. 청마가 만선일보에 자기 손으로 썼다고 하더라도 공통의 부끄러움이다”고 말했다.

 

유치환에 대해 김 교수는 “흠될 일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가령 자주 인용되곤 하는 ‘만선일보’의 그 짧은 글귀는 아주 없었던 것이 백번 좋았을 것”이라며 “하지만 그건 그 당시 다 같이 사슬에 묶인 우리들로서는 어느 누구의 혼자만의 목소리가 아니다. 일종의 공적인, 규격화된 ‘관용어’의 하나다. 온 겨레가 쓰디쓰게 입에 올려야 하는 ‘상투어’였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 교수는 “그 당시 모든 한국인의 학교에서도 아침마다 소위 ‘황국 국민의 서사’라는 것을 고함쳐야 했던 것”이라며 “그것은 일제 치하에서 중학교 1-2학년을 겪어야 했던 필자의 뇌리에 안쓰럽게도 종기자국처럼 지금도 눌러 붙어 있다”고 설명.

 

김 교수는 “만선일보의 그 짧은 기사 하나를 대서특필하려는 경향 때문에 일부러 언급한다는 것은 굳이 강조해서 말씀 드리고자 한다”면서 “최남선 서정주 정지용 이상 현상윤 유진오 김성수 안재홍 등 문화계며 교육계의 거인들은 유치환을 친일시인으로 보아가고 있는 시선 속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매우 궁금하다”고 말했다.

 

IE000851555_STD.jpg btn_rcm_s.gif btn_blog_s.gif btn_detail_s.gif29일 오후 경상대 해양과학대학 강당에서 열린 유치환 학술토론회에서 박한용 연구실장과 김재용 교수, 박태일 교수는 “유치환은 친일 작품을 썼고, 그래서 기념사업을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에서 발제했다. ⓒ 윤성효 icon_tag.gif유치환

"기념은 공공적인 성격 띤다"-"조심스럽게 접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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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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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용 : “청마 기념사업을 생각한다”는 제목으로 발제한 박한용 연구실장은 “친일행위들을 연구하면서 그 사람들이 문인이나 예술가일 때 더 가슴이 아프다. 왜냐.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배신감이 들어서다”고 말했다.

 

박 실장은 “친일 문제가 있으면 긴장감을 가진다. 민족반역자 아니냐는 것인데, 너무 비학을 한다. 그것이 아니라 청마의 긴 삶 속에서 친일작품을 볼 것이 아니라 당대 문인들이 가졌던 삶을 같이 봐야 한다”면서 “문학예술인들이 1938년부터 본격적으로 친일로 나갔다”고 말했다.

 

박 실장은 “기념인물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그를 우리 사회의 건강한 가치관의 한 표상으로 형성, 확산하려는 긍정적의 의의가 있다”면서 “기념은 기억의 적극화한 표현으로서 사회적 행위이며 공공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설명.

 

그는 “친일행위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일본 제국주의의 요구와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위를 한 사람을 말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요구와 이익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1910년에는 매국행위였고, 1937년부터 1945년 사이 일제는 우리한테 목숨을 내놓으라는 시기였다. 일본인이 말해서 말을 잘 듣지 않겠다고 해서 황국신민화 교육을 했다. 자발적으로 일본군으로 나가도록 했으며, 그 시기에 조선의 지식인을 활용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 집권기의 무분별한 기념사업, 친일파 후손들의 공익보다는 사익, 주관적, 집단적 이익 몰이 등이 기념사업의 주축이 되면서 반기념운동을 자초한 것”이라며 “공익성을 지닌 국가와 지자체는 국민의 세금으로 무원칙하게 기념사업을 남발해 사후 문제를 더욱 크게 조장하였다”고 설명.

 

그는 “친일인물 기념사업에 대한 냉정한 비판과 극복의 모색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면서 “맹목적인 반대도 아니며 언론이 호들갑스럽게 떠드는 소위 친일파 마녀사냥과는 실상이 멀다. 무조건 그들의 이름을 역사에서 지우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고 덧붙였다.

 

그는 “친일파들을 이야기하자는 것은 죽은 그들을 꺼집어내서 모독하자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일본․중국과 우리는 역사 문제로 싸우고 있다. 간도문제 등이 그렇다.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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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복거일씨.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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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 : “친일 문제에 대한 방법론적 성찰”이란 제목으로 발제한 복거일씨는 ‘친일파’와 ‘친일행위’ 등을 설명했다. 그런 다음 복거일씨는 “지금 별다른 문제없이 친일행위로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은 언뜻 보기보다 훨씬 적다”면서 “그런 행위들로 이내 꼽을 수 있는 것들은 아마도 독립운동을 한 조선인들에 대한 고문과 여자들을 속이거나 납치해서 ‘종군위안부’로 만든 행위 정도일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당사자들이 모두 죽었고, 기록들과 증거들이 많이 없어졌고, 증언들도 실질적으로 얻기 어려운 지금, 친일파를 어렵지 않게 가려낼 수 있는 생각은 친일 문제가 아주 어렵고 복잡한 문제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나온다”고 덧붙였다.

 

복거일씨는 유치환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친일파에 대한 시각을 설명했다. 그는 “친일행위들은 또렷이 정의하기 어렵고 친일행위들을 한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어렵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친일 행위들과 친일파들에 대해 그 죄과를 묻고 판결을 내릴만한 법적․도덕적 권위를 지닌 것도 아니고, 그런 판결이 우리 사회의 개선과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근거도 없다”고 설명.

 

그는 “친일 문제가 아주 어려운 방법론적 문제를 품었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겸허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7.12.2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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