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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시의 '비적'이 항일독립군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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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갑생 댓글 0건 조회 572회 작성일 05-12-1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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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시의 '비적'이 항일독립군 아니라고?
글쓴이:전갑생2005-12-13 17:33:07
유치환 시의 '비적'이 항일독립군 아니라고?
[오마이뉴스 2004.10.06 10:05:20]
[오마이뉴스 전갑생 기자] ''십이월의 북만(北滿) 눈도 안 오고 /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 이 적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 비적(匪賊)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 반쯤 뜬 눈은 / 먼 한천(寒天)에 모호히 저물은 호북(湖北)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 너희 죽어 율(律)의 처단(處斷)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 질서(秩序)를 보전(保全)하려면 인명(人命)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유치환의 시 <수(首)>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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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환은 극작가인 형 유치진과 함께 친일문인으로 의심받고 있다.
<실록 친일파>를 쓴 고 임종국 선생은 글의 서문에서 “유치환의 ''수(首)’(<국민문학>, 1942. 3) 역시도 거짓말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시가 ''친일'' 시라고 밝혔다.

임종국 선생은 “ ''작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목이 효수된 그 시의 ‘비적(匪賊)’은 대륙 침략에 항거하던 항일 세력의 총칭이었다”고 했다.

이에 통영문인협회 정해룡 회장은 ‘청마의 시 수(首) 새롭게 들여다보기-친일은 가라’(<한산신문>, 2004년 7월 9일자)에서 “비적이 독립군이란 주장을 관철시키려면 ‘일본 정부 문서 보관 창고’에 가서 당시 북만주에서 독립군을 비적이라 했는지, 그 때 효수된 머리 두 개는 누구누구의 머리인지 기록돼 있을 것이니 그것을 찾아내어 그 주장을 입증해야 객관적인 타당성이 확보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비적이 독립군이다’고 애매모호하게 흘리는 것은 설득력을 얻기 힘든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이 글은 ‘비적’이 항일독립운동가인지 아니면 정해룡씨 주장대로 “글자 그대로 떼지어 다니면서 살인 약탈을 일삼는 도둑의 무리”인지를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또 이를 통해 일제가 북만주에서 단순한 도적 무리를 비적으로 표현했는지, 아니면 비적을 항일독립운동단체로 보는지 명확하게 밝히고자 한다.

''비적''이란 1939년 만주국 만철사원회(滿鐵社員會)에서 발행한 <만주사전>은 ''비적(匪賊)''을 시기별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비적''은 만주사변 이전인 옛 동삼성(東三省)시대 마적(주로 몽고족)으로 “호자(胡子)·호비(胡匪)·홍발자(紅髮子)”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마적을 ‘비적’이라고 했다.

한인(漢人)이 만주에 들어와 마적 또는 비적이 되는 연혁을 이 사전은 4기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1기는 한인이 몽고족(몽비) 등의 습격을 막기 위해 마을 주민의 자위 기관으로서 기마대가 발생한 시기다.

2기에는 마을 주민의 자위기관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마을에서 독립된 용병단 형태를 띠는데 마을 방위 임무는 그대로 인수된다. 1기와 2기의 방위단은 마대(馬隊)를 조직해 만주의 산야에서 활동했는데 부랑성이 강한 청년들이 많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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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발행된 <만주사전>에 나온 ''비적'' 규정
3기에 들어서면 1·2기와 달리 식민지 특색이 없고 마적화돼 소위 토비(土匪)로 바뀌었다. 당시 마적은 모리배 호자(산적), 대가 호자(大街胡子, 도시마적)로 나뉜다. 모리배 호자는 산림을 채벌하면서 주로 여행자를 강탈하는 강도 수준이었다. 대가 호자는 사람을 납치하는 전문 마적들이었다.

마지막 4기에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 발생한 항일세력들이 ‘비적’의 범주에 들어갔다. 당시 일제와 만주국은 9·18사변(만주사변) 이후 봉기한 옛 동북군계의 항일군(抗日軍)을 병비(兵匪) 또는 정치비(政治匪)로, 토착 종교 세력의 항일군을 종교비(宗敎匪) 또는 회비(會匪)로, 한인(韓人) 민족주의계 독립군을 선비(鮮匪)로, 마적계(馬賊系) 항일(抗日)부대를 토비(土匪)로, 그리고 중국 공산당계 유격대를 공비(共匪) 또는 사상비(思想匪)로 구분했다.

이는 유치환이 하얼빈 주변에 거주하면서 시 ''수''를 지어 비적을 비난한 때와 맞아떨어진다. 이처럼 4기에 해당되는 ''비적'' 규정에는 산적이라든지 도시 마적은 없었다.

이는 1933년 1월 26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중공(中共) 만주성위(滿洲省委) 각급 당부(各級黨部)에 보낸 서한 (소위 일월서간(一月書簡))에서도 확인된다.

중국 공산당은 이 서한을 통해 여러 항일부대와 통일전선(統一戰線)을 강조했는데, 그 성격을 4가지로 구분했다.

1. 순수 구 길림군계(吉林軍系) : 장학량(張學良) 휘하 장령(將領; 마점산, 이두, 정초, 소병문, 주제청 등)이 지도.

2. 왕덕림(王德林) 부대 등 반일의용군(反日義勇軍) : 대부분 농민·노동자·소자산 계급으로 구성.

3. 농민유격대(대도회·홍창회·자위단) : 소자산 계급·지식 분자도 참가하지만 대부분 농민.

4. 적색(赤色) 유격대 : 공산당 지도 하의 노동자·농민·혁명 병사 등으로 구성
1과 2는 일제 규정에 따르면 병비 또는 정치비이며 3은 종교비 또는 회비가 된다. 4의 경우 공산당 영향력이 강하면 공산비 또는 사상비로 분류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토비가 됐다.

뿐만 아니라 일제가 한국 독립군을 비적이라 일컬은 자료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30년대 이청천·이범석의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도 선비(鮮匪)와 병비(兵匪)로 꼽고 토벌 대상으로 삼았다(''재만조선인(在滿朝鮮人)의 불령행동(不逞行動) 및 단속상황'', <독립운동사 자료집> 10).

37년 6월 4일 보천보 전투에 참가한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 김일성 부대를 비적(共匪)이라 했으며 32년부터 40년까지 항일유격대장을 지낸 안상길(安尙吉, 1907~1947) 부대도 비적으로 지목됐다(만주국정황관계잡찬, <비적 동정과 토벌 상황 관계 1(匪賊動靜竝討伐狀況關係 1)>, 37. 12. 20~38. 6. 17과 37. 10. 24~37. 11. 17).

그러므로 정해룡씨 지적처럼 "비적이 독립군이라는 말은 설득력을 얻기 힘든 주장"이 아니다. 일제와 만주국이 지칭한 비적은 항일 반만주국 저항단체였다.

만주국의 적은 ''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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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발행된 <건국 10년간의 제반업적>에 나온 ''비적'' 규정
일제의 ''비적'' 관련 문서 868건 정도가 일본 국립 공문서관(公文書館)에 있다. 그 대부분은 유치환 시인이 살았던 길림성과 하얼빈 지역 자료다.

<건국 10년간의 제반 업적(建國 十年間の 諸般業績)>(일본외교협회, 1942.5)을 보면, 주일 만주국 대사관 참사관 산이무부(山梨武夫)는 ''비적''에 대해 “공비(共匪), 토비(土匪)로 나뉜다”고 했다.

또 “작년 4월 국군(일본군과 만주군)을 정비해 토벌을 강력 추진하고 있다”며 “만주국 발전은 병대를 정비하고 비적을 토벌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는 만주국 최대 현안으로 치안을 꼽은 것이며 이 가운데 최우선은 ''비적 토벌''이었다. 41년 4월 일본군의 ''비적 토벌'' 자료에는 하얼빈을 중심으로 ‘공비군(共匪軍)’을 토벌하는 지도까지 들어 있다.

유치환 살던 일대 ''특별 중점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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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3월 하얼빈 중심으로 항일세력을 토벌했다는 작전도.
이 토벌은 해방까지 이어진다(<4월에 있어 공산비군 태세 요도의 건(4月に於ける共産匪軍態勢要圖の件)>(쇼와 16년, <육만밀대일기(陸滿密大日記)> 제 8호, 1941. 4). 이 책에는 41년 3월 30일, 4월 27일, 5월 26일 일본 관동군이 하얼빈 인근 항일단체를 토벌했다고 돼 있다.

또 42년 1~3월 2만명의 항일 세력(共匪)을 토벌했으며, 43년 4월 9일부터 11월 30일까지 하얼빈 주변 토벌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만주국 정황 관계 잡찬(滿州國政況關係雜纂), <치안 정황 관계(治安情況關係)>, 1943). 또 43년 2월 하얼빈시는 공비 세력 소탕을 위해 경무청 경제보안과를 설치하고 토벌 작전을 벌였다.

유치환 시인이 40년 6월부터 해방 직전까지 북만주 빈강성(賓江省) 연수현(延壽縣) 신구(新區)의 ''자유이민촌 가신흥농회'' 농장을 경영하며 하얼빈 협화회에 근무할 당시에도 주변에서 ''비적 토벌''이 이어졌음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일제는 “39년부터 연수현 등 북부 7개 현과 동남부 4개 현을 ''특별 중점 지구''로 지정하고 공비를 토벌하고 침략을 막았다”고 했다(일본정치문제조사소, <만주행정경제연보>, 1941).

이처럼 일제 문헌에서 ''비적''은 단순한 ''도적 무리''가 아닌 항일운동가를 지칭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유치환의 시구에 나오는 ''비적의 머리 두 개''도 항일운동가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유치환의 ''수''가 친일 시비를 벗어나려면, 오히려 만주 항일 집단을 절대 비적이라 하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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