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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시의 ‘비적’은 독립군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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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갑생 댓글 0건 조회 832회 작성일 05-12-13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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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시의 ‘비적’은 독립군이 아니라고?
글쓴이:전갑생2005-12-13 17:10:20
315광장]유치환 시의 ‘비적’은 독립군이 아니라고?

전갑생(경남 근현대사 연구회 연구원) /


유치환.
유치환 시 <수<首>>와 ‘비적’(2)

중국 공산당은 이 서한을 통해 여러 항일부대와의 통일전선(統一戰線)을 강조했는데, 그 성격을 4가지로 구분했다.

1. 순수 구 길림군계(吉林軍系) : 장학량(張學良) 휘하 장령(將領)(마점산, 이두, 정초, 소병문, 주제청 등)이 지도.

2. 왕덕림(王德林) 부대 등 반일의용군(反日義勇軍) : 대부분 농민·노동자·소자산 계급으로 구성.

3. 농민유격대(대도회·홍창회·자위단) : 소자산 계급·지식 분자도 참가하지만 대부분 농민.

4. 적색(赤色) 유격대 : 공산당 지도 하의 노동자·농민·혁명 병사 등으로 구성.(일본 국제문제연구소 중국부회(中國部會), <중국 공산당사 자료집> 제6권(동경, 경초서방, 1973).

1과 2는 일제 규정에 따르면 병비 또는 정치비이며 3은 종교비 또는 회비가 된다. 4의 경우 공산당 영향력이 강하면 공산비 또는 사상비로 분류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토비가 됐다. 뿐만 아니라 일제가 한국 독립군을 비적이라 일컬은 자료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30년대 이청천·이범석의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도 선비(鮮匪)와 병비(兵匪)로 꼽고 토벌 대상으로 삼았다(‘재만조선인(在滿朝鮮人)의 불령행동(不逞行動) 및 단속상황’, <독립운동사 자료집> 10).

37년 6월 4일 보천보 전투에 참가한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 김일성 부대를 비적(共匪)이라 했으며 32년부터 40년까지 항일유격대장을 지낸 안상길(安尙吉, 1907~1947) 부대도 비적으로 지목됐다(만주국정황관계잡찬, <비적 동정과 토벌 상황 관계 1(匪賊動靜竝討伐狀況關係 1)>, 37. 12. 20~38. 6. 17과 37. 10. 24~37. 11. 17).

그러므로 정해룡씨 지적처럼 “비적이 독립군이다는 말은 설득력을 얻기 힘든 주장”이 아니다. 일제와 만주국이 지칭한 비적은 항일 반만주국 저항 단체였다.

◇만주국의 적은 ‘비적’

일제의 ‘비적’ 관련 문서 868건 정도가 일본 국립 공문서관(公文書館)에 있다. 그 대부분은 유치환 시인이 살았던 길림성과 하얼빈 지역 자료다.

<건국 10년간의 제반 업적(建國 十年間の 諸般業績)>(일본외교협회, 1942.5)을 보면, 주일 만주국 대사관 참사관 산이무부(山梨武夫)는 ‘비적’에 대해 “공비(共匪), 토비(土匪)로 나뉜다”고 했다. 또 “작년 4월 국군(일본군과 만주군)을 정비해 토벌을 강력 추진하고 있다”며 “만주국 발전은 병대를 정비하고 비적을 토벌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는 만주국 최대 현안으로 치안을 꼽은 것이며 이 가운데 최우선은 ‘비적 토벌’이었다. 41년 4월 일본군의 ‘비적 토벌’ 자료에는 하얼빈을 중심으로 ‘공비군(共匪軍)’을 토벌하는 지도까지 들어 있다.

◇유치환 살던 일대‘특별 중점 지구’

이 토벌은 해방까지 이어진다(<4월에 있어 공산비군 태세 요도의 건(4月に於ける共産匪軍態勢要圖の件)>(쇼와 16년,<육만밀대일기(陸滿密大日記)> 제 8호, 1941. 4). 이 책에는 41년 3월 30일, 4월 27일, 5월 26일 일본 관동군이 하얼빈 인근 항일단체를 토벌했다고 돼 있다. 또 42년 1~3월 2만명의 항일 세력(共匪)을 토벌했으며, 43년 4월 9일부터 11월 30일까지 하얼빈 주변 토벌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만주국 정황 관계 잡찬(滿州國政況關係雜纂), <치안 정황 관계(治安情況關係)>, 1943). 또 43년 2월 하얼빈시는 공비 세력 소탕을 위해 경무청 경제보안과를 설치하고 토벌 작전을 벌였다.

유치환 시인이 40년 6월부터 해방 직전까지 북만주 빈강성(賓江省) 연수현(延壽縣) 신구(新區)의 ‘자유이민촌 가신흥농회’ 농장을 경영하며 하얼빈 협화회에 근무할 당시에도 주변에서 ‘비적 토벌’이 이어졌음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일제는 “39년부터 연수현 등 북부 7개 현과 동남부 4개 현을 ‘특별 중점 지구’로 지정하고 공비를 토벌하고 침략을 막았다”고 했다(일본정치문제조사소, <만주행정경제연보>, 1941).

이처럼 일제 문헌에서 ‘비적’은 단순한 ‘도적 무리’가 아닌 항일운동가를 지칭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유치환의 시구에 나오는 ‘비적의 머리 두 개’도 항일운동가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유치환의 ‘수’가 친일 시비를 벗어나려면, 오히려 만주 항일 집단을 절대 비적이라 하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마땅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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