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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푸른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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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디지털 말 작년11호 댓글 0건 조회 875회 작성일 03-06-06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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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푸른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글쓴이:디지털 말 작년11호2003-06-06 13:33:00
일제시대 인물발굴 : 조두남
  일송정 푸른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류연산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로 시작되는 가곡 「선구자」를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거의 없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저명한 성악가들이 음악회에서 레퍼토리로 삼는 일이 흔하다. 정치인들도 노래 부를 자리가 되면 곧잘 이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몇 해 전, 이 노래의 작곡자인 조두남과 작사자인 윤해영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작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내용으로 이 노래가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바가 없었다. 연변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 류연산씨는 일제시대 조두남, 윤해영과 함께 활동한 이들 중 생존자들을 찾아내 직접 인터뷰를 통해 감추어진 역사의 진실을 밝혀냈다 (편집자 주). 



김삼웅 선생의 편저로 된 『친일파 100인 100문』(1995년, 돌베개)을 보면 「오색기 너울너울 낙토만주 부른다」라는 제목 아래 소제목으로 ‘가곡 「선구자」 작사하고 「낙토만주」로 변절한 윤해영’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이러하다.

윤해영(尹海榮 1909~?) 함경도 출생. 젊어서 만주로 건너가 소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문학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년시절에 관해서는 대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다. 가곡 「선구자」를 작곡한 조두남은 수상집 『그리움』에서 윤해영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두남
“…연신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 막고 기침을 해대는 그는 고생으로 시달린 풍상의 흔적과 병색이 완연했지만 예리하고 번뜩이는 그의 눈엔 뭔가 새로운 저항과 저력이 보였다. 윤해영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구깃구깃한 종이 한 장을 내 앞에 내놓았다. 거기에는 「용정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일송정 푸른 솔은?’으로 시작되는 구절의 시가 적혀 있었다. 조국광복을 기다리는 노래를 꼭 지어달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난 그는 내 곁에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윤해영의 가곡 「선구자」는 이렇게 하여 조두남에 의해 작곡되었고 비극적인 시사성과 장중한 선율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이 되어 최근까지 ‘의식 있는’ 행사장에서는 이 노래가 연주되어 숙연함을 더해 주기도 한다.

이 글에서 보면 윤해영은 「용정의 노래」를 지은 다음인 1938년부터 가곡 「오랑캐고개」 등 친일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용정의 노래」는 1930년대 초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삼웅 선생은 이 근거로 『중국조선족문학사』를 들고 있다. 이른바 중국 조선족의 문학계 권위자들이라고 하는 분들이 모여서 1980년대 말에 편찬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는 「선구자」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선구자」는 1930년대 초기에 창작된 뒤 널리 보급되어 크나큰 영향력을 산생한 노래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현대의 영마루에 서서 흘러간 민족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외래의 강포에 대항했고 민족해방을 위하여 분연히 떨쳐나 슬기와 용맹, 절개와 위훈으로 자랑을 떨친 우리 조상들, 특히 선구자들을 절절하게 추모하면서 민족의 비운을 한몸에 지니고 나라와 민족을 건져낼 선구자들의 출현을 그같이 고대하고 있다. 이 노래는 그 시적 정서가 비장하고 겨레의 넋이 세차게 사품치고 민족의 염원과 정서를 대변함으로 하여 당시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주 널리 전승되어 불리고 있다.


선구자 악보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 「선구자」는 만주 룡정을 배경으로 한 독립운동가를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중국 조선족들도 대개 그렇게 믿어 왔다. 작곡가 조두남 선생은 21세의 열혈청년으로 목단강(오늘의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이 윤해영의 가사에 곡을 붙였다고 알려졌다. 오양호 교수는 「선구자」는 1932년 “원망의 대지, 만주땅을 누비며 민족의 한을 전신으로 저항하며 겨레의 숙원을 대변한 절창(絶唱)”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오양호 교수는 자신이 쓴 『윤해영의 선구자와 친일시 락토만주』의 글 첫머리에서 작곡가 조두남 선생이 이 노래(「선구자」)의 가사를 쓴 윤해영에 대해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했다는 것으로 장식했다.

1932년 내가 만주 하얼빈에 살고 있을 때 나를 찾아왔다. 키가 작고 마른 체격에 함경도 말씨를 쓰는 그는 시 한 편을 내놓으며 곡을 붙여달라고 하고는 표연히 사라져버렸다. 그가 그 노래를 곧 찾으러 오겠다고 했기에 나는 작곡을 해놓고 기다렸으나 그 청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주고 간 시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독립군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나에게 왔다 간 뒤 어쩌면 어디에선가 전사했을 것이다.

조두남에 따르면 「선구자」가 1932년에 창작되었고 조두남은 윤해영과 잠깐 만나 통성명이나 한 정도의 초면이고 한 번 만난 뒤로는 다시는 상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사자 윤해영은 독립군이라고 추측한다.


조두남의 거짓말 ●●


이 노래는 창작된 지 40년이 지난 1963년 12월 30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바리톤 김학근이 불러 유명해졌다고 하고 그 뒤로 기독교방송국에서 「정든 우리 가곡」의 시그널 뮤직으로 7년간 방송함으로써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노래와 함께 더욱 유명해진 조두남 선생은 1975년 이 곡명을 따서 「선구자」라는 수필집을 낸 바 있다고 한다. 참으로 민족적 자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전설적 이야기라 하겠다. 이 모든 것을 역사의 진실로 고스란히 받아 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역사는 무정한 것, 사실을 떠난 욕망으로 진실을 대체할 수 없다. 필자는 조두남 선생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그것이 역사의 진실이었으면 하는 심리의 포로가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나름의 욕망에 그칠 수도 있다는 슬픈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1990년 룡정에서 선구자탑을 세운다고 했을 때 연변 음악계의 원로이신 김종화(金種華 1921년 12월 3일 화룡현 룡문향 태생) 선생이 연변대학 민족연구소의 박창욱 교수를 찾아 오랫동안 마음에 꼬깃꼬깃 간직했던 이야기를 했는데 그 내용인즉 음악가의 양심으로 「선구자」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었다. 필자는 1995년 5월 2일 연길시 흥안향 흥안촌 김종화 선생 댁을 찾아 취재를 했다.
조두남 선생과는 언제 만났습니까?

“1942년 겨울이었습니다. 자그마한 유랑극단이 신안진으로 공연을 왔대서 「라이온 오페라」에서 악장질을 했던 정씨하고 함께 구경을 갔댔습니다. 그들의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나보다 키가 조금 클사한 거쿨진 사내가 손풍금을 타면서 4, 5명 악사를 지휘하며 연주하는 음악 프로였습니다. 강마른 얼굴의 손풍금 연주가가 타는 탱고 「라, 콤바르시타」, 룸바 「마리네나」는 아주 이채로웠습니다. 주제와 화려한 바레션의 대조, 오른손의 주선율과 왼손의 대위선율의 통일, 룸바의 선율과 리듬의 배합, 「양산도」에서의 비브라토 처리 등 모두가 나를 매혹시켰습니다. 특히 정서처리가 아주 섬세했답니다. 정서전환구에 이르러 실죽 웃는 표정과 회전의자에서 빙그르 도는 멋진 몸동작 등 그대로 옹근 몸에서 음악이 흘러나왔지요. 내가 저분이 누구인가고 묻자 정씨는 조두남 선생이라고 알려주더군요. 그런데 그의 왼손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며칠 후 드디어 의심을 풀게 되었답니다. 그는 약침쟁이(마약중독자)였던 것입니다.”

이후 조두남 선생과 음악활동을 얼마 동안 같이하셨습니까?

“광복까지니깐 햇수로는 3년입니다. 함께 무대공연에 나간 것은 1943년 가을 목단강 유랑극장에서 가진 「동만총성 추계민족예술제」였습니다. 그때 신안진악단이 중심이 되어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출연한 프로로는 모두가 조두남 선생의 작곡이었는데 자기의 새 출발을 주제로 한 기악조곡 「한 사나이의 반평생」 「농촌의 사시절」, 남성독창 「고향생각」 등 여러 수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고향생각」과 「룡정의 노래」는 남수억이 불렀는데 지금 그는 팔가자(화룡시 팔가자진)에 생존해 있습니다.”

윤해영 선생은 언제 알게 되었습니까?


선구자비 
“1944년 봄이랍니다. 목단강에 살던 조두남 선생이 우리 집으로 와서 녕안에서 자기가 신곡발표 공연을 하니 기타 연주를 해달라고 청을 하더군요. 그래서 갔어요. 나는 기타 연주를 맡고 새 악사들의 연습도 도왔답니다. 그때 녕안의 어느 여관에서 나는 조두남 선생의 소개로 「룡정의 노래」 작사자인 윤해영 선생을 뵙게 되었습니다. 조두남 선생보다는 두세 살 위이고 키가 작고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녕안협화회(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만든 친일단체)에서 일을 본다고 하데요. 그때 신곡발표 공연에서 처음으로 「룡정의 노래」를 불렀답니다.”

「룡정의 노래」가 바로 지금의 「선구자」라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네. 그러합니다.”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 「선구자」가 확실히 있었습니까?

“1962년엔가 어느 날 서울방송을 들을라니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오더군요. 1944년 봄에 녕안에서 조두남 선생의 신곡 작품으로 발표한 그 「룡정의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노래 제목이 「선구자」로 돼 있더라구요.
특히 가사에서 보면 유랑민의 서러움이 역력히 보이는 ‘눈물 젖은 보따리’나 ‘흘러온 신세’ 같은 구절은 없어지고 그 대신 ‘활을 쏘던 선구자’‘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로 되었더군요. 원 가사에는 ‘선구자’라는 어구가 전연 없었답니다. 「룡정의 노래」를 발표한 그 당시 목단강 지대는 물론 한국 전체에서도 항일투쟁이 이미 퇴조기에 들어갔으며 군경들의 경계가 삼엄한 때인데 커다란 녕안극장에서 감히 ‘조국을 찾겠노라 말 달리던 선구자’라고 노래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시기 서울에서는 일장기를 걸고야 음악회를 했다고 하는데 그처럼 「선구자」를 노래했다면 그것은 민족해방 투사가 아니라 우매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연주에 참가한 나 역시 나이가 어리긴 했어도 단군역사를 배웠고 애국가를 부르며 자라났으므로 일본놈이 되기 싫어 끝내 일본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이긴 했어도 그런 담력까지는 갖지 못했었습니다. 「선구자」는 원래의 곡이긴 하지만 「룡정의 노래」를 가사로부터 제목에 이르기까지 모두 뜯어고친 것입니다.

한국의 책을 보면 「선구자」는 1932년에 창작된 것이라고 하는데 그건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당시 룡정에서 불렸다고도 하는데 그때 룡정에서 살았거나 공부를 했던 사람들이 그런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답니다. 그리고 예술가란 자기의 작품을 자랑하기를 좋아한답니다. 조두남 선생도 그러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나하고 2년이나마 사귀어 왔고 허물없는 사이였지만 그런 말 한 마디 없었다구요. 1944년 봄에 녕안에서 가진 신작발표 공연에서 처음으로 「룡정의 노래」를 내놓았습니다.”

그러면 조두남 선생은 왜 1932년에 윤해영을 만난 뒤로는 다시 상봉하지 못했고 윤해영이 「선구자」라는 가사를 썼다고 했을까? 광복 전 몇 해 동안 윤해영과 왕래하면서 여러 수의 노래를 창작했고 아울러 동료들과 함께 윤해영의 집에서 파티까지 가졌으면서도 왜 윤해영을 독립군 전사로 미화하고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측을 했을까? 광복 후 냉전으로 말미암아 조선반도가 분단되고 중국과의 왕래도 끊어졌으니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한국 국민한테 해도 윤해영, 김종화 등 동료들이 모를 거라는 생각에서 한 말일까.


독립운동가로 바뀐 친일파들 ●●


그리고 「룡정의 노래」를 「선구자」로 뜯어고친 것은 조두남 선생의 소행일까, 아니면 제삼자의 소행일까. 노래의 가사가 후세 사람에 의하여 임의로 고쳐졌다면 그것은 역사의 진실을 뜯어고친 것과 같다.


용정에서 본 선구자비 
만일 조두남 선생의 회상을 사실이라 믿어서 윤해영 선생이 「선구자」를 1932년에 썼다고 하자. 하지만 이미 알려진 윤해영의 광복 전 창작품에서 이른바 「선구자」를 빼고 애수에 젖은 동요 외에 「발해고지」 「해란강」 「사계」 「오랑캐고개」 「락토만주」 등은 친일시들이다. 1938년에 창작한 「오랑캐고개」에서 시인은 “오늘은 이 고개에/오색기 나붓기고/폭도군 젊은이들이여/노래소리가 우렁차서/두만강 나루터엔 다리가 걸리고”로 일제통치를 찬양했다. 그 후 1943년에는 「락토만주」를 창작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색기 너울너울 락토만주 부른다/백만의 척사들이 너도 나도 모였네/우리는 이 나라의 복을 받은 백성들/희망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송화강 천리 언덕 아지랑이 향화촌/강남의 제비들도 봄을 따라 왔는데/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은 일군들/황무지 언덕우에 힘찬 광이 두르자//끝없는 지평선에 오곡금파 굽실렁/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흥겨워/우리는 이 나라에 터를 닦는 선구자/한천년 세월에 영화만세 빛나리.”

보다시피 락토만주는 글 전체에서 일본의 괴뢰정부 만주국을 찬양하는, 친일의 냄새가 물씬물씬 풍기는 노래이다. 그는 만주국에서 학교 선생을 했고 일제의 주구단체인 녕안협화회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으로 독립군은 절대 아니었으며 오히려 친일단체에서 일하면서 친일 시를 써온 문인이었다.

당시를 살아온 문인들 중에 일제의 강압정치에 억눌려서 민족의 양심을 저버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조두남 선생도 「징병제 만세」 「황국의 어머니」라는 친일노래를 작곡했다. 김종화 선생은 1944년 조선 청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양 골목에 나붙은 무슨 악극단의 포스터를 보았는데 조두남 작곡으로 된 「간첩은 날뛴다」였다. 이를 보고 공연을 관람하게 됐는데 내용은 ‘간첩’들이 경찰서를 치는 것을 주의하고 미리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한 간첩이란 항일세력이었으니 「징병제 만세」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이상의 사실을 귀납한다면 윤해영과 조두남은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윤해영은 일제의 협화회에 근무한 사람이고 「선구자」 아니 「룡정의 노래」는 애수의 노래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조두남은 한때 약침쟁이로 타락했던 사람이고 만주 신안진에서 식객으로 있으면서 애수의 노래를 짓거나 일제의 침략을 위한 선전으로 극단을 조직하여 전국을 다니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소탕하는 것을 찬양한 가극을 연출하고 다녔던 사람이다. 이러한 작사자와 작곡가의 신상을 돌이킨다면 우리의 가슴에 「선구자」 노래가 장엄하게 안겨올 수 없다.

「선구자」는 오늘날 우리 민족 모두가 애창하는 비장한 노래로 되어 있다. 이러한 실정에서 그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것은 아쉬운 일이긴 하지만 자못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 글을 마무리 짓는 이 시각 필자는 밀물처럼 덮쳐오는 허탈감에 가슴이 오리오리 찢긴다.


* 류연산씨는 연변대학과 광주 중산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연변인민출판사 편집위원 겸 종합편집부장을 맡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수필집 「서울바람」, 소설집 「황야에 묻힌 사랑」, 장편기행문 「혈연의 강들」(상, 하) 이 있다.


제 197 호 2002 년 11 월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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