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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정한 '친일작품'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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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마이뉴스 댓글 0건 조회 1,136회 작성일 05-12-13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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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정한 '친일작품' 썼다
글쓴이:오마이뉴스2005-12-13 15:05:34
소설가 김정한 '친일작품' 썼다
최현배, 손진태, 유치환도 남겨
박태일 경남대 교수, 11일 학술토론회에서 밝혀
윤성효 기자 ysh@ohmynews.com  
'낙동강의 파수꾼'이라는 별칭과 함께 부산.경남지역 지식인의 대명사격이었던 소설가 요산 김정한(1908~1996) 선생이 일제말기 친일작품을 남긴 것으로 밝혀졌다. 경남대 박태일 교수는 11일 경상대 인문학연구소(소장 이영석)가 마련한 쟁점학술토론회에 참석, '경남 지역문학과 부왜활동'이라는 제목의 논문발표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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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지역 문인들의 '부왜 활동'과 관련한 토론회가 11일 경상대에서 열렸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박태일 교수는 "조만간 김정한 선생의 친일작품과 관련해 별도로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라면서, 요산이 쓴 친일작품으로 1943년 9월 <춘추(春秋)>에 발표한 '인가지(隣家誌)'를 소개했다. 그동안 이 작품은 문학계에서 작품명만 알려져 오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그 내용이 공개됐다.

요산은 19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사하촌'이 당선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동래 출신으로, 교사로 재직 중 일제에 항거하다가 구금되기도 했고, 그후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문과를 중퇴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민주신보> 논설위원, 부산대 교수 등을 지냈으며, 1969년 중편 <수라도>로 제 6회 한국문학상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옥심이> <항진기> <제3병동> 등이 있고, <김정한 소설집> 등의 작품집이 있다.

요산은 1940년 일제의 발악이 극에 달할 무렵 한동안 붓을 꺾었다가 1966년 <모래톱 이야기>를 통해 문단에 복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박태일 교수는 다르게 해석했다. 박 교수는 "중앙문단에서 볼 때 지방에 있는 문인들이 지방문단에 작품을 발표하는 것을 두고 절필이라고 볼수도 있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김정한 선생은 흔히 '일제 말엽에는 절필하여' 지조를 지킨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30년 초 작품 발표를 시작한 그는 이른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으로 전시동원체제의 수립이 획책되었던 1938년부터, '국민총력운동'으로 전시동원체제가 강화되었던 1940년을 거쳐 1943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편의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먼저 나온 다른 논문에서 요산의 일제 말엽 작품에 대해 등장 인물의 대응 방식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는 했다. 그런데도 '인가지'는 단지 이름만 알려져온 작품으로, 박 교수는 "<춘추>에 실린 작품은 그 뒤 여러 차례 이루어진 김정한 선생의 해석에서도 늘상 빠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처음 작품내용이 공개된 문제의 '인가지'는 희곡이다. 지원병에 곧 나가게 될 '개동'(22살)이를 전장에 나가기 앞서 혼인시킨 뒤 보내려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로 점찍었던 여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촌극을 다룬 작품이다. 지원병 가족을 힘써 도와줘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담고 있다. "이는 '총후'의 '국민총력운동' 실천에 이바지하고자 한 '국책극'이 되고 있다"고 박 교수는 해석했다.

요산 선생이 부산대 교수로 있을 당시 부산대에서 학위를 받은 박 교수는 생전에 이 작품에 대해 요산 선생에게 물어보았느냐는 질문에,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고, 만약 물어 보았다면 요산 선생은 웃어 넘겼을 것이라 본다"고 박 교수는 말했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친일작품'과 '친일문인'은 엄연히 다르다. 요산 선생이 친일작품을 남겼다고 하여 친일문인이라 단정할 수 없다. 요산 선생을 기리는 문학상이며 기념관 등은 당연히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지난해 <중앙일보>에서 제정한 '미당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바 있으며, 또 최근에는 <조선일보>에서 크게 보도했던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의 친일문학 작품을 찾아내 세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친일'이란 말보다는 '부왜'라고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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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일 교수 ⓒ 오마이뉴스 윤성효
박태일 교수는 '친일'이란 말보다 '부왜(附倭)'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근대, 곧 국권회복기나 나라 잃은 시기 동안 제 이익을 위하여, 겨레를 버리고 왜로에 빌붙어 겨레에게 남다른 해꼬지를 했던 사람"을 '부왜인'이라 해야 한다는 것.

'부왜작품'에 들 수 있는 조건으로 여러 가지를 제시했다. '표기 언어(한글, 일어)를 어느 것으로 삼았느냐' '문학 양식에 왜로의 것을 본뜨거나 즐겨 창작했는지' '작품의 주제와 내용이 어떠한지' '작품이 실린 매체의 성격이 어떠하냐' '뚜렷한 사회 활동이나 공개 입장 표명이 있었느냐' '부왜작품, 부왜문인, 부왜인은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는 점' 등.

박태일 교수는 논문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부왜문인을 벌주거나, 한때의 잘못을 내세워 그들 문학 모두를 묻어버리기 위한 집단적 가학의 도구로 끌어다쓰기 위한 일이 아니다. 문학에서나 삶에서나 그들보다 행복하지 못했지만, 보다 떳떳한 이들의 문학이 있고 삶이 있다면, 무엇보다 그들부터 제 자리를 찾도록 해야 할 일이라는 성찰과 결의를 드러내는 한 방식일 따름이다. 지역의 '부왜활동'과 '부왜인'에 대한 연구가 더욱 깊어지기를 바란다."

민속학자 손진태, 비평가 조연현도 '친일작품'

한편 박 교수는 경남지역 문인들의 '친일(부왜)작품'에 대해, 여러 가지 부류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일본어로 작품을 쓴 '내지(內地,일본 본토)문단' 활동의 문인으로는 김병호(1929년 '일본시인' 등)와 손진태 등을 지목했다.

민속학자의 거두로 알려진 손진태도 '친일작품'을 썼다는 사실도 새로 소개했다. 경남 동래에서 태어난 그는 1926년부터 1942년까지 평론, 민요번역, 민속에 관한 글을 썼는데 이와관련, 박 교수는 "'내선일체'의 이념적 바탕을 꾸준하게 뒷받침한 일이 있어 '민속학의 1세대'라는 말에 물음표를 던질 수 있다"라고 평했다.

한글로 작품을 쓴 '반도문단' 활동의 문인으로는 김용호(1943년 시 "산록" 등), 이극로(1940년 신년시 <경성일보> 발표), 김수돈(1943년 일문시집), 정인섭 등을 들었다.

나라 잃은 시대 '절사'한 문인도 있었다

박태일 교수는 지역에서 친일작품을 쓴 문인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문인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모름지기 지역의 근대문학인 가운데서는 그들 가까이 올려세울 만한 이들이 없었다는 뜻인가"라며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깨끗하게 속으로 절조를 지키다 돌아가신 분, '절사(絶死)'한 문인들도 있다는 것.

1894년 갑오억변과 경술국치를 거치면서 충렬사 동백숲에다 깊은 울음을 묻었을 통영지역 시자들의 문학이 있다는 것. "1910년 경술국치를 거쳐 1920년대 민족, 반제활동과정에서 순사하거나 원사한 문학인이 어찌 한 둘에 그칠까 보냐."

장춘식 장하보 박차성 이상조 선생 등을 들었다. 청마와 같이 1920년대 후반 <생리> 동인으로 얼굴을 내밀었던 장춘식 선생은 북녘에서 '절사'한 것으로 박 교수는 보고 있다. 장하보 시인 또한 예사롭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설명했다.

박차성 열사를 "매음녀로 스스로를 꾸민 뒤 중국 상해로 건너가 조선의용대 여자대장으로 싸우다 순사한 그다. 그의 작품은 작은 조각이나마 그냥 지나칠 수 없다"라고 박 교수는 소개했다.

이상조 선생에 대해 박 교수는 "1930년대 중반 눈빛 형형한 사회주의였던 그가 남겼을 소설을, 당장 우리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여 묻을 수만은 없는 일"이라는 것.

"나라 잃은시기 광복항쟁의 나날 속에서, 하루하루 생존의 싸움을 거듭하면서 나라 안팎 그 어느 자리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채 잊혀져 갔을, 한 때는 마냥 슬프게 젊었고 또 한 때는 마냥 아름답게 늙었을, 적지 않은 문학인을 아득히 짐작해 본다."


박 교수는 또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이 1942년 친일잡지 <동양지광> 7월호에 소설(일본어로 씀)을 남겼다"며 "남달리 오래동안 한글사랑을 실천해온 이들이 보여주는 미심쩍은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 깊이있는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비평 영역의 대표적 사람이었던 조연현에 대해 박 교수는 "신세대 문학인으로서 철없이 부왜의 길로 나섰다"라고 지적했다. 창씨개명했던 조연현은 1942년부터 시와 평론을 통해 부왜의 빛깔이 높은 글을 발표했다. '조연현 문학상'에 대해 제정할 필요가 없는 상이라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또 아동문학가이자 '고향의 봄' 작사가인 이원수가 친일시와 수필을 남긴 사실도 새로 공개됐다. 이씨가 친일성향의 수필을 남겼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밝혀진 사실이다. 일제가 충남 부여에 신궁(神宮)을 건립한 것과 관련, "고도감회-부여신영어조영 봉사작업에 다녀와서"라는 제목의 수필이 그것.

박 교수는 "이원수는 1930년대 중반부터 전향의 길을 걸어, 1940년대에 이르면서 확실하게 전향의 표시를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밖에 유치진(극작가), 유치환(시인), 이광래, 신고송, 김소운(수필가), 이주홍(아동문학가), 김상옥(시조시인), 고두동(시조시인) 등을 언급했다. 이들 가운데 시조시인 김상옥은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박 교수는 "김상옥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자매지인 일어판 신문 <경성일보>의 '경일단가'에 1943년 1월 19일 '단가'를 한 편 실었다"고 밝히고는 "(친일성향의 작품이) 더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시조시인 고두동의 '단가' 등을 언급하면서 "지역 시조문학의 전통속에 녹아있는 '왜풍 문학'의 그림자를 엿보게 하는 사실이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박 교수의 발표에 대해, 경상대 강희근 교수는 "이 순간 엄숙한 자리가 되었다. 발표내용이 긴가민가한 생각도 들지만 심도있게 고찰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친일(부왜)문학' 연구에 있어 조건을 제시한 것은 의미있다"며 "주제와 내용은 물론 작품의 표기방법과 양식까지 살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의미 있다"고 평가했다.


2002/04/11 오후 9:18:49
2002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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