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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1,054회 작성일 16-05-13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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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친독
글쓴이:친2016-05-13 16:53:06
이은상의 친독재 경력

3.15와 10.18의 도시 “민주성지 마산‘이 그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
권력에 빌붙어 곡학아세를 일삼고 입신양명을위해 권력자의
● 아부의 극치를 보여준 이은상
이승만 80회 생일 송가 헌시

「이 겨레 위하시어 한 평생 바치시니
오늘에 백수홍안 늙다젊다 하오리까
팔순은 짧으오이다 오래도록 삽소서」
이 시조는 이은상이 1955년 이승만의 80회 생일(3월 26일)에 지어 받친 ‘송가( 송가)라는 제목의  경축시다. 1955년 희망 4월호-
※80회 생일 불과 4개월 전인 1954년 11월 29일, 이승만은 대통령 종신집권을 위해 불법적으로 대통령 중임제(헌법에서 대통령은 임기4년에 두 번이상 연임할수 없도럭한 제도)를 폐지하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우리나라 헌정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의 하나로 흔히 ‘사사오입(반올림)개헌’이라한다.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의 독재로 야당과 국민들의 분노는 부글부글 끓고 잇었지만 이은상은
이승만 정권 시절, 헌법 상 대통령이 3선을 할 수 없는 제한을 철폐하기 위해, 당시의 집권당인 자유당(自由黨)이 사사오입의 논리를 적용시켜 정족수 미달의 헌법개정안을 불법통과시킨 제2차 헌법개정. 
1948년 대한민국 성립 시에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도록 되어있던 헌법을 1952년에는 대통령 직선제안 헌법으로 개정하여(발췌개헌) 이승만(李承晩)이 중임되었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3선을 하고자 하였으나 당시의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는 4년제이며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제한하고 있었다. 이에 이승만과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개헌(改憲)을 준비했다.1954년 5월 20일에 실시되는 민의원 선거에서, 3선 개헌에 찬성하는 사람을 후보로 추천하여 다수 당선시켰고, 무소속 의원들도 다수 유인하여 개헌 정지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UN에서 한국 통일을 위한 선거안이 제기되었다. 정부는 이에 대하여 국가 안위에 관한 사안은 국민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국민투표제를 제기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국민투표제를 대표 안건으로 내세우고, 이와 더불어 3선금지조항 폐지·국무원의 연대 책임제 폐지·개별 국무원 불신임 인정·부통령의 대통령 승계권 부여 등을 골자로 헌법 개정안을 제출하려 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자유당에서는 김두한(金斗漢)을 제외한 전 의원과 다수의 무소속 의원이 서명에 참여하여 국회에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국회에서 비밀투표를 한 결과(1954. 11. 27), 재적의원 203명, 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이 135표, 반대가 60표, 기권이 7표로 나타났다. 당시의 개헌 가능 의결정족수는 재적의원의 2/3 이상이었으므로 이 개헌안이 가결되기 위한 충분한 선은 136명이어야 했다(재적의원 2/3는 135.33…명이므로, 자연인은 136명이어야 함). 따라서 당시 사회자였던 부의장 최순주(崔淳周)는 부결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은 수학의 4사5입론을 적용하여 135.33명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0.33이란 자연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반(半)도 안되는 소수점 이하는 삭제하는 것이 이론상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자유당은 의원총회에서 이 안을 채택하여 국회에서 재론하기로 하였고 이에 반발한 야당 의원들은 모두 의사당에서 퇴장하였다. 자유당 의원들만 남은 자리에서, 자유당 의원 125명 중 123명이 찬성하여(김두한, 민관식 의원만 반대), 개헌안을 통과된 것으로 결정하고(11월 29일) 이를 정부로 이송하여 결국 개헌안을 공표·발효하였다.  

이미 부결 선언된 개헌안을 번복하여 가결시킨 행위(위헌), 야당이나 국회의장, 사회자의 의견을 무시한 행위(국회법 위반), 이론적으로도 필요충분한 가결선은 136명이어야 함에도 이치에도 맞지 않은 이론을 적용한 행위(비법리, 비논리 강제 적용) 등은 의회 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국민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이러한 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자유당 정부의 독재적 행태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3선 대통령의 뜻을 이루었고, 이는 자유당의 장기 집권과 독재가 연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자유당 내 양심적 의원들이 탈당을 하면서 점차 당의 정당성과 위력이 붕괴되어 갔다. 상대적으로 야당세력은 호헌동지회를 설립하면서 한데 뭉쳐 강력한 야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헌법을 불법적으로 개정하면서까지 장기 집권하려는 사례는 훗날 우리 헌정사에서 대통령이 장기집권과 독재를 하기 위해 헌법을 마음대로 변개하는 취약성을 드러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사오입개헌 [四捨五入改憲] (두산백과)




●(사)충무공기념사업회와 이은상
1955년 10월 설립된 사단법인 충무공기념사업회의 이사장은 이은상이고 회장은 이기붕이었다. 국방부장관과 3군 사령관이 이사로 참여했다. 이승만은 평화선을 넘어온 일본어선을 잡아 그 배를 처분하여 사업기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는 기념사업회에서 7년 동안 사무국장을 맡아 일 해온 김용태의 증언이다.(월간조선 2002년 4월호, 「두목」 金龍泰, 혼신의 다섯 시간 證言) 
회장을 맡은 이기붕은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으며 서울시장을 거쳐  한국전쟁당시에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고 당시는 제 3대 민의원 의장으로서 자유당의 명실상부한 제 2인자였다. 특히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해 사사오입개헌사건을 주도했다.
기념사업회의 김용태는 박정희 김종필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61년 5.16쿠데타에 민간인으로 참여해 공화당 원내총무를 지내는 등 3공화국의 실세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는 5년 뒤, 1960년 3.15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월혁명으로 경무대 관사에 피신해 있다가 큰 아들 강석의 총격으로 일가족이 자살했다
이은상은 50년대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와 실세들을 옆에끼고 엎에끼고 그는 문화권력이었다

이은상은 이후부터 당대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문화권력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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