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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은상 댓글 0건 조회 1,135회 작성일 16-05-13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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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친독
글쓴이:은상2016-05-13 16:49:27
이은상의 친독재 경력

3.15와 10.18의 도시 “민주성지 마산‘이 그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

● 이승만 80회 생일 송가 헌시
1955년 이승만의 80회 생일(3월 26일)에 '송가(頌歌)'라는 제목의 경축시를 헌사함 (이 겨레 위하시어 한 평생 바치시니/ 오늘에 백수홍안 늙다젊다 하오리까/ 팔순은 짧으오이다 오래도록 삽소서) -1955년 희망 4월호-
※80회 생일 불과 4개월 전인 1954년 11월 29일, 이승만은 대통령 종신집권을 위해 불법적으로 대통령 중임제를 폐지하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우리나라 헌정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의 하나로 흔히 ‘사사오입(반올림)개헌’이라한다.

●(사)충무공기념사업회와 이은상
1955년 10월 설립된 사단법인 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이은상이고 회장은 이기붕이었다. 국방부장관과 3군 사령관이 이사로 참여했다. 이승만은 평화선을 넘어온 일본어선을 잡아 그 배를 처분하여 사업기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는 기념사업회에서 7년동안 사무국장을 맡아 일을해온 김용태의 증언이다.(월간조선 2002년 4월호, 「두목」 金龍泰, 혼신의 다섯 시간 證言) 
김용태는 박정희 김종필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5.16쿠데타에 민간인으로 참여해 공화당 원내총무를 지내는 등 3공화국의 실세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회장을 맡은 이기붕은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를 지냇으며 서울시장을 거쳐  한국전쟁당시에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고 당시는 제 3대 민의원 의장으로서 자유당의 명실상부한 제 2인자였다. 특히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해 사사오입개헌사건을 주도했다.
그는 5년뒤, 1960년 3.15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월혁명으로 경무대 관사에 피신해 있다가 큰 아들 강석의 총격으로 일가족이 자살했다
당시 대힌민국 최고 권ㄹㄱ자들과 어깨를 나란히한 문화권력이었다.


● 60년 3.15정부통령 선거 유세 이승만=이순신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정하에서 치르게 된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종화, 김말봉 등과 문인유세단을 조직하여 전국 순회강연을 하면서 자유당 이승만, 이기붕 정부통령 후보를 지지. 독재자 이승만을 “이순신 장군 같은 분”이라며 구국의 위인이라 칭송함 -1960년 사상계 5월호-

● 3,15의거와 4.11민주항쟁 비난, 마산시민 모독
60년 3.15부정선거에 저항하여 마산에서 일어난 3.15의거와 4.11민주행쟁에 대해 '무모한 흥분'으로,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로 마산시민을 비난하고 '불합리,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라고 모독하면서 시위가 확대되는 것을 '마산사람으로서 염려하며 마산시민들에게 자중하기를 바란다.'는 발언 -60년 4월 15일 조선일보-

● 「충무공전서」정부 지원비를 5.16쿠데타 모의 자금으로 불법유용
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있던 이은상은 문교부로 부터「충무공전서」발간 사업으로 지원 받은 돈을 쿠데타 모의 자금으로 불법 유용하였다. 

● 5.16위해 4월학생혁명탑문을 짓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가 집권초기에는 마치 4월혁명의 계승자인양 행세하며 3.15의거와 4.19혁명을 치켜세웠다. 특히 4월혁명의 주역이었던 학생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현 서울 수유리 국립묘지에 4월학생혁명탑을 건립을 지시하면서 이은상에게 탑문을 짓도록했던 것이다. 1963년 9월 20일 이 탑을 준공햇는데 이은상의 지은 탑문이 문제가 되어 세간의 비웃음과 질타를 받게 되었다. “1960년 4월”이라고 적어야 할 것을 “1959년 4월”이라고 썼기 때문이다. 불과 2 ,3년 전의 역사를 말이다
특기할 일은 당시 4월혁명 전 과정을 보고 겪은 대한민국의 모든 유,무명시인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분노와 슬픔, 환희의 감정을 한두 편의 시로 표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러나 유독 이은상만은 3.15, 4.19와 관련된 단 한편의 시도 쓰지 않았다.

● 공화당 창당선언문 작성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공화당을 창당할 때 창당선언문을 작성함,

● 유신선포 지지
72년 10월 25일 이은상은 청우회 중앙본부 회장이라는 명의로 “해방직후 혼란기와 6.25동란때에 1만7천여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반공구국운동을 해온 우리 청우회는 이번조치로 민족주체세력을 구축하여 조국의 평화통일을 촉진하며 무질서와 비능률을 배제하여 국기를 공고히 햐려는 박대통령의 영단에 적극찬동한다.” 는 유신지지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10년 이상 철권통치로 독재정권을 장악해온 박정희는 더 이상 정권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의 선포,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금지, 헌법의 일부 효력정지와 비상국무회의에 의한 대행, 새 헌법개정안의 공고 등을 내용으로 하는 '대통령 특별선언'이 발표되었으며, 10월 27일 평화적 통일지향,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표방한 개헌안이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공고되었다.
이에 따라 11월 21일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투표율 92.9%에 91.5%의 찬성으로 확정되었다. 12월 27일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하는 한편 유신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박정희는 3권(법부.사법부.행정부)을 틀어쥐게 되었고 영구집권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신통치는 결국 79년 부마민주항쟁을 불러왔고, 박정희는 부하의 총에 피살(10.26사태)당하고 말았다.


● 악법 중의 악법, 긴급조치 9호 지지를 위한 ‘총력안보국민협의회’ 의장

75년 5월 13일 한국현대사에서 최대의 악법이라고 하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고 며칠뒤 총력안보서울시 협의회를 창립(75년 5월 31일, 반공청년회 재향군인회 서울시교욱위원회 98개 관변단체로 구성)하고 이은상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조직은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강화하고 긴급조치 9호를 정당화하기위해 총력안보라는 미명하에 대규모 대중동원이 가능한 상설 관변단체를 만들었다. 이듬해인 76년 이은상은 총력안보국민협의회 의장이되었다.



1975년 4월 베트남 패망과 미국의 패전으로 월남전의 파병국이었던 대한민국도 큰 충격에 빠졌다. 박정희는 이를 정치적으로 역이용하여 공산국가에 대한 공포와 국가안보에 대한 국민들의 위기의식을 최대한 고조시켜 총력안보와 국민총화라는 미명 아래 동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다.
긴급조차 9호는 유신헌법을 비방하거나 반대하는 행위는 물론, 유언비어 유포, 허가없는 학생시위와 집회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영장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으며 언론사도 停.廢刊시킬 수 있고 이 조치를 비방하는 사람은 1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 할수 있게 했다.
긴급조치 9 호는 박정희 독재를 상징하는 최대의 악법으로 간주되고 있다.
79년 10월 부마항쟁으로 박정희가 10.26사건으로 피살당하고 12월 8맇 최규화 대통령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 공고 제 67호로 긴급조치 9호 헤제를 선포했다. 이날  문익환 목사와  함세웅 신부 등 68명이 전국 교도소에서 석방될 때까지 4년 7개월동안 수많은 학생 민주인사 시민들이 이 조치에 저촉되어 감금 구속된 사람이 800명이 넘었고 감시, 연금, 연해, 고문, 수배, 징집등의 고통을 당한 사람은 이루 헤아릴수가 없을 정도이다. 
전국토의 감옥화 전국민의 죄수화 라는 유행어를 낳았다.

● 건국훈장 셀프 수여
77년에 원호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 심시위원 11명 중에 이은상이 참여 했다.
이때 이은상은 조선어학회사건 관련으로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세간에서 셀프수여라는 말로 비웃음을 샀다.
참고로 조선어학회 사건의 중심인물들은 북으로 간 이극로를 빼고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선생과 같은 분들은 이미 62년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이은상은 당시 전남광양에서 광산관련 일을 하고 있던 중이었고 그의 스승 이윤제와 서신을 주고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함흥경찰서로 끌려갔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나왔다.

● 박정희가 강탈한 장물 영남대 설립의 일등공신
대구 청구대 교수로 재직당시 박정희에게 대학재단 설립(영남대)을 강력히 권유하고 독립운동가 야청 최해청이 세운 청구대를 강탈하여 박정희에게 헌납하는 작업에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모의함 -청구증언-

● 독재자에게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를 팔아먹은 반민족 시인
충무공이순신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있던 이은상은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인 출신이라는 약점을 성웅 이순신성역화사업을 통해 박정희=이순신이라는 이미지를 교모하게 결합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함.
그리고 스스로 안중근의사숭모회 회장이 된 이은상은 1979년 5월 21일자로 ‘박정희 대통령 각하’에게 보낸 ‘건의서’를 통해 ‘안중근 의사 탄신 1백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성역화 사업을 추진할 것을 제안하면서 “이것은 오직 각하께서만 명령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 “각하의 역사적 영단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직접 현장에서 설명을 드리고 하교를 받잡고자 합니다”라고 탄원했음.
1979년 9월 2일이 안중근의사 100주년 탄신일이었고, 불과 한 달 보름 뒤 부마항쟁이 일어났으며 곧이어 10.26사건으로 박정희 사망.
이순신 장군에 이어 안중근 의사까지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 독재자의 이미지 세탁용으로 이용될 뻔했음.

● 장충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에게 아첨하는 글을 바침
전두환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후 장충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자 1980년 <정경문화> 9월호에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에서 "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 무엇보다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 여론"이라는 글을 헌사하고 이듬해 4월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됨.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 5.18항쟁을 전두환이 광주학살로 진압한 것을 다행으로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 국민회의에 의해 대통령으로 당선된 전두환을 축하하는 글을 헌사함(정경문화 80년 9월,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
이은상은 이 글에서 ‘강력한 지도자는 국민의 동반자다’라는 소제목으로 “10.26사태이후 두어 차례나 위급한 고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앞에는 안팎으로 닥쳐오는 난관이 겹겹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에 모든 여론들이 한결같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고 아첨을 늘어놓았다.
10.26이후 12.12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에게 두어 차례 위급한 고비는 대학생들의 서울역집회와 광주5.18항쟁이었다.

● 친일광신도를 덕망 높은 사회사업가로 칭송
일제로부터 애국옹이란 칭호를 받은 친일광신도 문명기(일본군 비행기 헌납운동 주도 등)의 비문(경북영덕)에 '축복받은 기업인으로 사회사업가“로 칭송하는 묘비문을 씀.

● 능수능란한 변신
문명기와 같은 영덕군에 새워진 3.1독립만세 기념탑에도 비문을 씀

● 독재부역의 대가로 받은 명예와 영광
5.16 민족상을 비롯해 국민훈장무궁화장. 금관문화훈장 등 훈, 포장을 받고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예술원종신회원 등 50여개의 사회단체장을 역임 했던 화려한 그의 경력 중 일부는 독재협력에 따른 보상과 곡학아세로 얻은 지위임.

※ 이은상의 친일의혹 논쟁은 현재 잠복 중
이은상은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약 10개월간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한 사실로 독립유공자가 되었음(연루자 33명중 구속자 29명, 이중 이극로는 징역 6년, 최현배는 징역4년 이희승은 3년 6개월 정인승은 2년, 옥사 2명, 이은상 등 13명은 예심에서 기소유예로 석방, 기타 불기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이후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에게 제기된 친일의혹은 아직 확실한 증거 자료를 찾지 못해 논쟁은 잠복중이다. (양측 모두 증언에 의한 기록만 남아있을 뿐) 10여 년 전, 만주제국 건국10주년(1943년)기념으로 만선학해사라는 곳에서 발행한 ‘반도사화와 낙토만주’에 글을 싣고 자신을 친일잡지인 ‘조광 주간’이라 밝힌 자료가 발견되어 이은상의 친일논쟁이 재점화 되었으나 이 자료만으로 그를 친일파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해방 전 그의 행적에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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