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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로 변장한 친일파 유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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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말 9월호- 류연산 댓글 0건 조회 652회 작성일 03-09-2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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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로 변장한 친일파 유령들
글쓴이:말 9월호- 류연산2003-09-28 14:46:00


1사진- 조두남 친일의혹 조사단과 연번학자들

「선구자」로 변장한 친일파 유령들
연변작가 류연산의 일제시대 인물발굴 ‘조두남 친일시대’ 그 이후
류연산
 

2003년 7월 20일 오전 연길시 성보호텔 귀빈접대실에서 황일두(마산시의회 의원)를 단장으로 하는, 노래 「선구자」에 대한 실태조사단과 연변 조선족 역사계와 문학계의 인사들이 간담회를 가졌다. 기자 셋, 조두남 선생의 둘째 사위를 제외하고도 마산시에서 온 공식 대표는 여덟 명이나 되었다. 희망연대 상임대표 김영만, 경남대학 조영건 교수, 개혁국민정당 강정철 위원장, 마산시립박물관 송성안, 문학인 김영수, 음악인 장기홍, 마산시청 정성철씨 등이었다. 그 외에 서울에서 온 민족문제연구소 박한룡 선생도 동석했다.

연변측에서는 박창욱 교수(연변대학 역사연구소장), 권철 교수(연변대학 문학연구소장), 최삼룡(문학평론가,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장), 최용린 교수(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손춘일 교수(연변대학 민족문화원 부원장), 박청산(역사학자, 연변인민출판사 부편심), 박장길(시인, 연길시 조선족예술단 창작원) 그리고 필자까지 여덟이었다. 오전 9시 반에 시작된 간담회는 2시간 넘어 진행되었는데 주요한 내용을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선구자」에 관한 연변학계의 시각

다음은 연변학자들이 김종화, 남수억 등의 증언과 『만선일보』 『반도사화와 낙토만주』 등 만주국 시기의 자료에 근거하여 조두남, 윤해영과 그들이 창작한 「용정의 노래」에 대한 역사적 분석이다.

첫째: 조두남, 윤해영에 대한 김종화 선생의 증언은 믿을 수 있다. 그는 중국 조선족음악계 원로이며 저명한 음악가로서 『중국 음악가 사전』에 오른 분이다. 한 생을 교육사업에 종사해온 그는 1957년 반우파투쟁 이후 연변사범학교 교단에서 쫓겨나 화룡으로 ‘정배’를 갔고 투도중학교에서 퇴직을 하기까지 평범한 음악교원으로 지냈다. 정치운동의 모진 세파 속에서 인생을 구겨야만 했던 그로서는, 광복 전 조두남, 윤해영과의 친분, 그리고 1943년 가을 목단강에서의 동만총성추계예술제, 1944년 녕안에서의 조두남 신작발표회에 참가하여 반주를 했고 그들과 어울려서 음악활동을 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될 수 없다. 더구나 그 한 단락 역사가 또 다시 문화대혁명이 일어난다면 빌미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김종화 선생은 역사를 미화하거나 추화할 추호의 이유가 없다.

둘째: 조두남과 윤해영이 1932년 목단강의 어느 한 사꾸라여관에서 만났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조선에서 목단강으로 가는 길은 도문을 통해야 하고 도문에서 목단강으로 가려면 멀고 높고 깊은 노야령을 넘어야 한다. 지금처럼 기차가 있고 버스가 있으면 몰라도 1932년 당시에는 이 험한 원시림에는 달구지도 겨우 다닐 만한 오솔길이 있었을 뿐이다. 도가선(圖佳線 도문-목단강-가목사) 철도가 개통된 것은 1935년 7월. 그렇다면 조두남이 어떻게 목단강으로 갔을까? 새처럼 날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료에 의하면 윤해영의 창작은 1937년 이후의 일이다.

셋째: 조두남의 회고에 의하면 「용정의 노래」는 1932년경에 창작되어 용정은 물론 전 만주에서 불려져 나라 잃은 백성들의 가슴을 불태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용정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조두남이 한때 음악활동을 했던 신안진, 목단강, 녕안현 일대에서도 그 노래가 불려진 적이 없다. 「선구자」 노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때는 1985년 이후의 일이다. 1986년 어느 한 한국인이 연변에서의 「선구자」 노래에 대해 문의해 왔었는데 전혀 알 수가 없는 일이라 박규찬 총장을 만나서 물었더니 그 역시 그런 편지를 받았다면서 용정에서 나서 자랐지만 듣도 못한 소리라는 대답이었다. 오늘까지 용정 태생이며 당시를 학생으로 살아온 사람들 중 생존해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모두가 똑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권철 교수는 신안진과 20리 떨어진 고장에서 나서 자랐고 최용린 교수의 고향 마을도 흑룡강 목단강 일대이지만, 두 분 모두 「선구자」 노래의 곡조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전 박장길 시인이 신안진에 다녀왔는데 그 마을에서 나서 늙어 온 82세의 노인의 말을 빌린다면 광복 후에 그도 가수로 노래를 불렀는데 「선구자」 노래를 불러주자 처음 듣는 생소한 곡이라고 하더란다. 「선구자」노래의 전신인 「용정의 노래」는 1944년 녕안 신작발표회에서 불려졌을 뿐, 전혀 보급되지 못한 노래라는 결론이다.

넷째: 조두남이 「선구자」를 통해 독립운동가로 미화해버린 윤해영은 녕안현협화회 선전과 간부였고 친일 시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시 중에서 「낙토만주」 「척토기」 「오랑캐고개」 「만주아리랑」 「아리랑 만주」는 적나라한 친일 시이다. 동시대 재만 조선인 시인들 중에서 그처럼 노골적으로 친일을 구가한 사람도 없고 일제의 검열을 통해 높은 평가를 받은 사람도 없다.

다섯째: 「선구자」의 곡조는 박태준의 「님과 함께」(1922년 창작)와 비교하면 16소절 중 13소절이 같다. 조두남은 박태준한테서 음악을 배운 적이 있다고 하며 「님과 함께」의 곡을 따다가 그대로 윤해영의 가사에 붙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했다.


한국 조사단의 반박논리

이번 간담회에서는 한국측도 여러 가지 설을 들었고 조두남 선생 생전에 친분이 깊었다고 하는 김영수 선생은 조두남의 인품을 들고 나오면서 절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구구히 설명했다.

그리고 연변의 견해도 김종화나 남수억의 구술에 근거한 것으로 자료는 없지 않은가 라고 주장했다. 그 대답으로 연변학자들은 김종화나 남수억 선생 역시 학식을 가진 높은 인격자임을 강조하면서 「선구자」의 1932년 창작설도 조두남 한 개인의 저술을 근거로 하고 있을 뿐이 아닌가 라고 반문했다. 똑같이 사료가 없는 상황에서는 조두남과 김종화, 남수억의 구술을 분석하고 그 역사적 상황에서 사실과 가까운 것을 택하는 것이 역사의 원칙이다. 자료에 의하여 윤해영은 독립군이 아니고 친일 시인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역사의 진실의 추는 연변학계 쪽으로 기울게 마련 아닌가.

또 한국측에서는 「선구자」는 「용정의 노래」와는 별개의 문제이며 그것은 6·25 이후에 개작된 것이라고 문제의 초점을 돌렸다. 그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였다면 왜 마산시에 세워진 조두남기념관에는 1932년 창작설을 내세웠고 윤해영과 조두남을 독립운동가처럼 분장하였는가?

황일두 단장은 「선구자」를 한국에서 계속 즐겨 부르고 조두남기념관을 그대로 둔다면 연변 학계에서는 어떤 반향을 보일 것인가를 물었다. 이에 박창욱 교수는 노래를 부르건, 기념관을 그대로 두건 그것은 한국에서 판단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에 대해 끝없이 말할 것이라고 했다.

간담회는 점심식사로 계속 이어졌고 오후 3시경에는 「선구자」의 가사의 현장인 용정시로 갔다. ‘선구자탑’은 1992년에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지금은 ‘일송정’이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 탑의 흔적은 기석의 남북 양쪽 벽에 남아 있다. 하나는 북쪽 벽에 검은 대리석 판에 새겨진 「선구자」 가사 전문이고 다른 하나는 남쪽 벽에 역시 검은 대리석 판에 새긴 「선구자」의 창작경위에 대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여기에서 보면 마지막 두 단락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용정의 노래」의 창작 적을 “광복에의 실망과 비탄에 젖은 동포들에게 심기일전 일제타도의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라는 부분이다. 「용정의 노래」가 「선구자」로 탈바꿈하기 전까지는 눈물에 젖은 비애의 노래였다. 말 달리던 놈도 활 쏘던 놈도 없는, 눈물 젖은 보따리에 흘러 흘러 온 세월을 한탄한 노래인데 어떻게 심기일전시킬 수 있고 용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저항심의 절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선구자」는 광복 후 그것도 1950~ 1960년대 무렵에 조두남 선생이 직접 가사를 뜯어 고쳤다고 승인한 바 있다.


「선구자」의 창작배경은 날조된 것

다른 하나는 “이 가곡이 반세기 동안 해외에 묻혀 있다가 … 선구자의 고향 땅 용정에 되돌아왔다”는 부분이다. 기실 해외에서 조작되어 생소한 고장으로 왔다고 해야 한다.

한때 중국 조선족학계에서는 「선구자」에 대한 한국 해설을 그대로 믿기도 했다. 1990년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중국조선족문학사』에도 그같이 기록되었다. 당시 이 책의 집필자의 한 분이었던 권철 교수는 그날 간담회에서 한국의 책 그대로 적었는데 책이 출판되고 이듬해 그것이 조작된 것임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사료를 수집하였는데 놀랍게도 윤해영의 친일 시를 발굴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최근까지도 한국 설을 따른 분이 한 분 있다. 바로 용정시 문화관장을 역임했던 전광하 선생이다. 전 선생이 주편을 맡은 『세월 속의 용정』(연변인민출판사 2000년 출판)에는 그가 쓴 「선구자와 용정」이라는 글에서 조두남, 윤해영을 극찬하고 「선구자」를 항일의 노래로 소개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의 책임편집은 나의 이름으로 되어 있어서 마산시장 등 조두남기념관을 고집하는 분들을 대변한 한국의 『우리신문』은 김욱 기자의 ‘선구자는 있었다 - 조두남 선생 친일행적 증언 신뢰성 상실’이라는 글에서 사치스럽게도 “유씨가 곡학아세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면서 나를 책을 팔아먹기 위한 깜 쇼나 부리는 놈으로 일축해 버리기도 했다. 소금 한 알 더 먹은 사람이 참는다고 했다. 소금에 살과 피와 뼈까지 젖어든 사람이 자본주의 금전논리에 살과 피와 뼈까지 찌든 사람을 상대로 시시비비를 따질 일은 없다.


「선구자」가 한국에서 ‘역수입’된 경위

얼마 전 『세월 속의 용정』의 주편을 맡았던 전광하 선생님이 최근에 글을 써서 「선구자」가 들어오게 된 경위와 자신이 「선구자」의 진상을 알게 된 과정을 서술하였다.

1986년 7월, 용정중학교에서 성대한 동창회 창립대회가 있었으며 미국에서 온 졸업생 서화숙 선생이 “몇십 년 만에 고향에 왔는데 고향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고 하면서 「선구자」 노래를 선창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에 사는 동창들한테는 아주 생소한 노래여서 함께 따라 부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며 이에 서화숙 선생은 세계 그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 동포들이 모두가 이 노래를 애창하고 있는데 왜 중국 사람들, 더구나 용정에 사는 사람들은 이 노래를 모르냐고 하면서 동창회가 끝나자 「선구자」 노래가 녹음된 테이프를 모교에 남기고 「선구자」가 창작된 과정을 자상히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당시 용정중학교의 교도주임을 하시던 이경득 선생이 테이프에 수록된 「선구자」를 기록하고 몸소 어느 오락장소에서나 이 노래를 부르면서 보급하였다고 한다.

2년 후인 1988년 11월 15일 한국 체신부에서 「가고파」와 「선구자」 음악시리즈 우표 각기 3백만 장을 발행하였는데 이 우표의 안내서에는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처음 작시할 때의 시 제목은 「용정의 노래」라고 합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그 암울하던 시절에 조국광복을 위해 피 흘리며 싸우다 죽어간 숱한 이름 모를 독립투사들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이 가곡은 두고두고 우리의 민족혼을 일깨우고 시대와 세월을 초월하여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라고 기록하였는데 그것을 보고 전광하 선생은 1990년 9월호부터 12월호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우표』지에 「선구자와 용정」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2000년 7월에는 용정지명 (청나라 관방에서 승인한 지명) 1백주년을 맞이하여 문사자료집 『세월 속의 용정』의 주편을 맡아 「선구자와 용정」을 다시 수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선구자 노래비는 역사에 대한 모독

이것이 바로 「선구자」가 독립운동가의 탈을 쓰고 중국으로 들어오게 된 경위이며 일부 조선족 학자들이 곧이곧대로 믿고 선전을 하게 된 과정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선구자」는 조두남이 나름대로 가사를 고치고 서투른 사기술로 치욕의 역사를 아름답게 포장하여 한국 국민을 상대로 보급한 노래일 뿐이다. 결코 일송정과 역사적 관련이 없다. 그런데 일송정에 ‘선구자 노래비’가 서 있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나의 고향」(홍난파 작곡)이나 「반갑습니다」는 역사의 유적지로서나 관광지로서의 일송정을 막론하고 아무런 관련도 없다. 다만 그것은 한국인들이 애창하는 노래일 뿐이다.

용정시 제1고급중학교 울 안에 세워진 대성중학교 옛 건물 안에는 용정시 연혁과 용정시가 낳은 자랑스러운 인물들을 소개하는 전시관이 설치되어 있다. 번마다 이곳을 다녀가면서도 무심히 지나쳤던 인물들인데 문득 모윤숙이라는 이름과 사진에 나는 눈 그루를 박았다. 그리고 또 부산학교에 세워진 ‘선구자 노래비’ 사진이 두 장씩이나 진열되어 있었다. 전시관에 걸려 있는 사진이 순간적으로 금새 터질 것만 같은 시한폭탄처럼 내 눈에 비쳤다. 광복 후 지은 죄가 무서워 한국으로 도망을 한 친일파들이 죽어서 유령이 되어 돌아와 비석에 새겨지고 전시관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결코 우리도 조두남기념관을 비웃을 처지가 아님을 깨달았다.

비암산의 노래비 조성인(造成人)에는 ‘한국거제시 해금강조경 용정시 명예시민 윤종환’이라고 새겨 있고 만든 날짜는 1998년 9월 3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한국의 돈으로, 한국인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조두남에 의해 오도된 「선구자」가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그 멜로디를 타고 친일시인 윤해영이 돌아오고, 또 홍난파, 모윤숙 등이 용정의 자랑이 되어 다시 나타나도록 한 것은 바로 돈의 유혹 때문이었다.

우리는 철학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돈의 힘에 따라 세상이 돌아가는 오도된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조두남이 부활하여 용정에 와서 일송정을 돌아보고 대성중학교 옛 건물 앞에 세워진 윤동주의 시비 앞에 선다면 어떤 느낌을 받을지 생각해 보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호소한 윤동주의 양심 앞에서 절대 머리를 쳐들지 못할 것이다.


가곡 「용정의 노래」(先驅者) 유래

(전략)
3.13독립선언,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간도조선인 대도살, 용정학생반일시위, 5?30반제투쟁, 해란강 대학살 등 1920년대에만 해도 수백 건의 파란중첩한 항쟁과 수난을 겪은 용정은 반일운동의 선구적 기반을 갖고 있는 실력의 도시였다.

1935년 전후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항일운동이 잠시 파괴되고 수많은 투사가 줄줄이 사라져가는 이 무렵 광복에의 실망과 비탄에 젖은 동포들에게 심기일전 일제타도의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키려고 내놓은 「용정의 노래」는 그 시절 용정 인민들의 지칠 줄 모르는 저항심의 절규였다.

그로부터 50여 성상, 지난날 용정인 작사자 윤해영, 작곡자 조두남 두 선생은 이미 타계하고 이 가곡은 반세기 동안 해외에 묻혀 있다가 1988년 이해승 등 해외 인사들에 의하여 선구자의 고향 땅 용정에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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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연산-연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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