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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속의 용정>집필 전광하씨 선구자에 대한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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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중의 소리 댓글 0건 조회 2,040회 작성일 03-08-19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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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속의 용정>집필 전광하씨 선구자에 대한 입장
글쓴이2003-08-19 12:04:00

[관련링크] http://kn.voiceofpeople.org


<세월속의 용정>집필 전광하씨 선구자에 대한 입장 

전광하  
「지난 7월 25일 모 인터넷 언론사에서 "선구자는 있었다"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세월속의 용정>을 두고 작곡가 조두남과 선구자에 대한 연변 학자들의 증언에 대해 신뢰성을 의심하는 기사에 대해, 전광하씨가 자신의 선구자를 알게 된 경위와 연변지역에서 선구자를 보급하던 경위등을 서술하면서 현재 자신의 입장을 밝힌 글이다.

전광하씨는 자신이 용정시 문화관장으로 용정에서의 선구자 보급에 상당한 일을 한 장본인임과 지금은 자신이 사기를 당한 기분이라는 입장을 밝히면서 이 글을 써 보내면서 기사화 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하는 원문이다.」


▲전광하 용정시 문화관장   
1986년 7월 반일투쟁의 책원지였으며 민족교육의 자랑이었던 용정중학교(원 대성중학교)에서 성대한 동창회성립대회가 있었다.

이 대회에는 미국, 카나다, 일본 등 해외의 대성중학교 졸업생 300여명과 국내의 졸업생 300여 명, 도합 600여 명이 참가하였다. 이날 모인 졸업생 절대 다수가 명문대학의 교수, 의사, 작가, 정치인들로서 모두 다 소재 나라의 당당한 동량들이었다.

미국에서 온 졸업생 서화숙선생이 만회를 할 때 <몇 십 년 만에 고향에 왔는데 고향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고 하면서 <선구자> 노래를 선창하였다.

그러나 중국에 사는 동창들한테는 아주 생소한 노래여서 함께 따라 부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서화숙선생은 세계 그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 동포들이 모두가 이 노래를 애창하고 있는데 왜 중국 사람들, 더구나 용정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이 노래를 모르는 가고 하면서 매우 이상하게 여기였다.

그는 동창회가 끝나자 <선구자>노래가 주입된 녹음 테프를 모교에 남기면서 <선구자>> 노래가 창작된 과정을 자상히 알려주었다.

소개에 따르면 <선구자>의 원 제목은 <용정의 노래>>로 1933년에 가사는 윤해영에 의하여 창작되고 이해에 조두남선생에 의하여 작곡되었다고 하였다. 가사의 구절마다 용정의 일송정, 해란강, 용드레우물, 용문교, 비암산과 같은 경물이 있기에 용정 사람으로 말하면 노래의 뜻 보다 더 친근감이 있어 당시 용정중학교(원 대성중학교)의 교도주임 사업을 하시던 이경득선생이 녹음테프에 수록된 <선구자>를 기보하고 몸소 어느 오락장소에서나 이 노래를 부르면서 보급하였다.

2년 후인 1988년 11월 15일 한국 체신부에서 <가고파>와 <선구자> 음악시리즈 우표 각기 300만장을 발행하였는데 이 우표의 안내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처음 작시할 때의 시 제목은 <용정의 노래>라고 합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그 암울하던 시절에 조국광복을 위해 피 흘리며 싸우다 죽어간 숱한 이름 모를 독립투사들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이 가곡은 두고두고 우리의 민족혼을 일깨우고 시대와 세월을 초월하여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연고로 <선구자>는 필자의 마음에 자리잡게 되었다. 1932년에 용정에서 창작되고 용정은 물론 전 만주에서 불렸다는 이 노래가 어찌하여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는가 하는 의문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줄곧 정치운동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번연히 알면서도 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으로 일소해버렸다.

그리하여 1990년 9월 호부터 12월 호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우표>지에 <선구자와 용정>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2000년 7월에는 용정지명 100주년(청나라 관방에서 승인한 지명)을 맞이하여 문사자료집 <세월 속의 용정>이란 책의 주편을 맡아하면서 <선구자와 용정>을 다시 수록하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용정 비암산 일송정 앞 <선구자 노래>비가 시야비야 의논이 있게 되면서 나는 드디어 냉정한 시선으로 <선구자>를 바라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용정에 서 나서 자란 노인들을 방문하여 <선구자>에 대해 문의했고 연길에 가서 문인, 학자, 교육계 오랜 인사들과도 논의를 하였다.

그러던 중 주두남, 윤해영과 함께 광복 전 목단강 일대에서 음악활동을 한 김종화선생님의 당시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책을 통해서 유관 인사들의 견해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에 필자는 깨친 바가 있었고 또 필자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반도사화와 낙토만주>(만선학해사 1943년 발행)에서 윤해영의 두편의 시 <낙토만주>와 <척토기>를 보고 드디어 윤해영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

이 책 머리에는 일제의 괴뢰정부 만주국 총리대신 장경혜(張景惠)의 <왕도낙토(王道樂土)>라는 제사, 아오끼 히소레(靑木一天)로 창씨 개명을 한 협화회 중앙본부의 박팔양의 머리글과 두 손에 조선인민의 피가 낭자한 전쟁범 도죠 히데끼의 문장, 관동군 사령장관, 일본육군소장, 만주국 치안부 이사장 등 악명 높은 일제의 간부들과 민족의 양심을 팔아먹은 일제의 어용 문인들의 글로 이루어진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집이다. 그 가운데는 당시 녕안협화회 선전과에 몸담고 있었던 윤해영의 시 <낙토만주>>는 뒷 표지 안에 수록되어 친일에 이채를 돋구었다.

역사가 증명하다시피 협화회란 철두철미한 친일 조직이었으므로 아오끼 히소레(박팔양)는 20세기 50년대에 조선작가동맹으로부터 일찍 숙청되었으나 윤해영은 오히려 한국에서 <선구자>노래와 함께 그 위상이 더욱 돋보이게 되었으니 참으로 삶은 소 대가리가 웃다가 턱 떨어질 웃음거리로 되었다.
 
(저자 약력)

전광하(全光河)1943년 12월 26일 용정출생
연변대학 졸업. 1963-1980년 교원, 공장장.
1981-1982년 용정시 조양천진 문화소장.
1983-현재 용정시문화관장, 용정시 문화예
        술계연합회 사무국장, 용정시
        문화예  술쎈타 창작평론실 주임 등

저서: <세계동물운동회>(이태수 공저)
        <세월 속의 용정>(주편)
       <조선족전통미덕이야기> 전서 중
       <이상포부편>

  그 외 수필, 가사, 소품, 동화 등 200여편

일제침략을 가송한 시를 줄줄이 써낸 윤해영에게, 일제의 협화회에서 <5족협화 왕도낙토>를 선전해 온 윤해영에게 <조국광복을 위해 피 흘리며 싸우다 죽어간 숱한 이름 모를 독립투사들에게 바치는 마음>>이 있었을까도 의문이다. 그리고 윤해영과 함께 음악활동을 해온 조두남선생도 <아리랑 만주>, <징병제 만세> 등 친일가곡을 창작하였다고 하니 그 역시 의문의 인물임은 불 보듯 뻔하다. 일제의 품에 안겨 어용 문인으로 된 윤해영, 조두남이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하겠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롱당한 기분을 삭일 수가 없다. <용정의 노래> 원 가사에는 선구자라는 구절이 전혀 없었고 <눈물 젖은 보따리>와 <흘러 흘러온 신세> 등과 같은 비애에 젖은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전혀 독립운동과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독립운동의 노래처럼 고친 데는 아마도 그 어떤 정치배경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초라하고 추한 것도 분식하면 일시적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하기에 오늘까지 <선구자>를 무수한 사람들이 애창하여 왔던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을 탓할 것은 없다.

그러나 전체 민족이 통째로 우롱을 당했다는 사실 앞에서는 참으로 복장이 터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아무리 아름답게 분식하였다고 하더라도 초라하고 추한 것은 결국 사람들의 증오의 대상이 된다. 창작 연대며 배경을 외곡하고 나타난 <선구자>는 민족사에서 유령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용정 땅에서 일송정은 영원히 푸를 것이며 해란강도 영원히 흐를 것이다.

                                                      2003년 8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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