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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세만 믿고 친일 망령 불러들이자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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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중조 댓글 0건 조회 979회 작성일 03-06-0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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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세만 믿고 친일 망령 불러들이자는 말인가?
글쓴이:홍중조(논설실장)2003-06-06 14:00:00
유명세만 믿고 친일망령 불러들이자는 말인가?


홍중조(논설실장) /




[홍중조의 고금산책]조두남, 그의 빛과 그림자

다가오는 29일은 석호(石湖) 조두남(趙斗南 1912~1984) 기념관이 개관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착잡한 감정을 떨칠 수가 없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그가 30여 년을 마산에 터를 잡고 생활해오면서 예술진흥에 크게 기여한 공로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왕성한 작곡활동과 후진양성에 진력해온 노고를 생각한다면 응당 축하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그의 과거행적에 나타난 미심쩍고 왜곡된 부분을 접하면 찜찜하다 못해 의분심을 억누를 수 없다. 지금 한창 설왕설래하고 있는 친일이냐 아니냐는 문제에 이르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게 한다. 우선 그가 걸어온 내력을 간략히 더듬어 보자.

너무나도 찜찜한 그의 과거

일찍이 조두남은 평양에서 태어났다. 5~6세 때 카톨릭 신부이며 음악가였던 죠셉 케논스로부터 피아노 작곡수업을 받을 만큼 음악의 신동이었다고 한다.

예닐곱살 적엔 교회에 나가 연주활동을 했으며 12세 되던 해에 김소월의 시 <옛 이야기>를 작곡했으니 천부적으로 음악성이 뛰어났음을 말해주고 있다.

1928년 첫 작곡집을 출간한데 이어 31년 <영가집>, 47년 <고향>, 49년 <옛 이야기>, 62년 가곡집 <분수>를 내고 75년과 82년에 수상집 <선구자>, <그리움>을 출간했다.

한국전 이후, 마산에 정착할 초기엔 궁핍한 생활 때문에 댄스홀에 나가 피아노를 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순수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해 줄곧 수준 높은 창작곡을 내는데 몰두한 그였다.

1962년에서 68년까지 마산예총지부장을 맡아 문화계에 주도적 역할을 해오기도 했다. 그가 남긴 기록에서는 유년시절과 마산에서의 활동은 비교적 소상하게 나타나지만 30~40년대의 행적만은 용정에서 지냈다는 것 이외는 베일에 싸여 석연찮은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최근 시민단체 ‘희망연대’가 강력히 제기한 친일행적에 대해선 분명히 짚고 넘어갈 문제라는 것을 밝힌다.

30~40년대에 <징병제 만세>, <황국의 어머니> 등의 가곡과 독립투사의 사기를 꺾는 <간첩은 날뛴다>를 발표했다는데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다.

또 다른 기록에는 당시 조두남은 반도인(한국인)이 많이 살고있는 동만주, 목단강, 하얼빈·연변 등지로 순회했던 <태양가극단>의 멤버였음이 나타나고 있다. 그 시절 일제는 중국침략에 이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자 총독부는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모든 연예인을 강압적으로 부려먹었다.

저들의 성전(聖戰) 완수와 군국주의를 찬양·선전하는 도구로 동원된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황국신민이 되겠다는 서약과 함께 통제수단인 기예증(技藝證)을 발급했다.

이 기예증이 없으면 활동금지에다 징병·징용으로 끌려가는 처지였으니 이를 모면하기 위해서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친일의 길을 택한 것으로 짐작한다.

당시 조두남은 <울지마라 봉선화야>라는 작품을 작곡한 일도 있었다. 이 악극의 주제가는 후일 그리움(고진숙 작시)의 가곡으로 발표됐다.

해방전후엔 <에밀레종>, 새별악극단의 <백마강 달밤>의 악극을 상연했는데 이색적인 작품으로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이런 사례들을 보아서라도 친일위문대인 유랑극단에 몸담아온 것이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특히 <선구자>의 노래말과 작곡에 대해서도 그동안 상당한 물의를 일으켜온 것도 사실이다. 그의 회고담에서도 윤해영(작곡가 윤극영의 6촌동생)을 독립투사라고 했지만 실상은 친일작가였음이 판명되고 말았다. 조두남은 윤해영의 서정적인 <용정의 노래>를 비장감 넘치는 <선구자>로 개사했다고 실토한 적도 있었다. 작곡 역시 고향선배인 작곡가 박태준(일제때 창신교 음악교사)의 <순례자의 노래>를 거의 표절했다는 시비가 한동안 끊이지를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묘지비문에는 영국 소모세트 대학교의 명예박사를 취득했다고 돼있다. 이 또한 영국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유령대학을 적어놓았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친일행각을 기념하려하나

이렇듯 조두남의 공과를 면밀히 검증하지 않은 채 유명세만을 믿고 무턱대고 기념관을 건립했다는 것은 졸속행정의 극치요 역사왜곡의 표상인 동시에 친일의 망령을 불러들이는 또 하나의 죄업이다. 항일투쟁사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연변에서는 조두남을 매국노로 규탄하고 있다.

그런데도 친일의 너울을 쓴 선구자에게 시민의 혈세로 기념관을 바치는 마산은 자주정신과 민족혼이 없다는 말인가. 윤이상을 섬기는 통영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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