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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을 상실한 시대는 꿈을 가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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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희망연대 댓글 0건 조회 630회 작성일 06-07-1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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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을 상실한 시대는 꿈을 가질 수 없다.
'공민왕과의 대화'를 읽고
박계순   
'신돈'이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천민이 춤을 추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신돈의 말에 왠지 모를 강한 유혹으로 신돈의 개혁과 그 실패를 지켜보는 심정으로 드라마를 열심히 봤다. 그러던 중 우연히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실패한 개혁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궁금증에 책에 손이 가 이 글을 쓰게 되었다.

14세기 고려, 왕이 원의 황제에 의해 임명되고, 백성들은 권문세족들에 의해 수탈되던 시대
고려의 자주권 회복과 개혁을 내세웠던 공민왕과 작가 이기담과의 대담형식으로 쓰인 책이다.
"나는 한번도 개혁을 포기 한 적이 없다."라는 공민왕. 하지만 우리에게 공민왕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는 노국공주, 신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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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신돈))의 두 주연, 신돈과 공민왕
2006-07-11ⓒmbc

원으로부터 임명된 왕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국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이 버티고 있는 정치상황에서 나라의 자주권을 회복하고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하기위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한 왕이 공민왕이었다.
지금 외세에 의해 분단, 미국과 FTA, 그리고 오랜 군사독재 끝에 6.10항쟁으로 얻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민주정부의 개혁에 실망한 우리가 그 해결책을 혹시 ‘공민왕과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혁을 상실한 시대는 꿈을 가질 수 없다."
공민왕은 14세에 원에 숙위(볼모)로 가서 바로 원의 황실에서 고려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결국 왕은 원으로부터 자주권을 회복하고 안으로는 권문세족을 누르는 일이 고려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왕은 개혁을 이루기 위해 새로운 세력인 이제현을 비롯한 유학자와 조일신, 김용 등을 위시한 연경수종공신들을 개혁의 중심세력으로 내세운다. 즉 개혁의 철학이 있으나 공민왕과 개인적 유대감이 없는 신진유학자, 공민왕에게 절대적 충성은 있으나 개혁에 대한 신념이 없는 연종수종공신.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왕자 신이 이 두 정치세력 사이에서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공민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공민왕은 서경'무일'편을 좋아하였고 신하들에게도 읽기를 권했다. 무일이란 게으르지 말고 노력하여야 한다는 고사이다. 주나라 초기 주왕이 조카 성왕과 함께 주나라의 토대를 이루었던 고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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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1ⓒhopenews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하고 신돈이 죽은 지 4년 후 왕이 죽고 그로부터 20년 후에 고려가 망하고 만다.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개혁을 위해서 양심적인 유학자인 이제현을 등용하고, 안정을 위해 왕의 측근인 조일신을 등용하여 균형을 이루려고 하였으나 항상 이 두 정치세력은 충돌한다. 이때 왕은 개혁이냐, 안정이냐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원이 고려왕을 임명하던 때라 왕족과 신하들은 누구나 원의 신임을 얻으면 왕이 될 수 있었기에 임금의 자리는 항상 불안한 자리였다. 결국 공민왕도 홍건적의 침입과 흥왕사의 난 등의 혼란으로 왕권강화의 필요성을 느껴 연경수종공신들을 위시한 측근들을 중용하게 된다. 이것은 개혁이 백성을 위한 개혁이 아니라 왕권강화를 위한 개혁이 되면서 결국은 공민왕은 측근인 홍륜, 최만생에 의해 피살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지금 우리의 현실도 공민왕 때만큼 녹록치가 않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한미 FTA와 진보세력의 지방자치선거 패배 등의 정치상황이다. 헌정사상 처음 행정권과 입법권이 선거를 통해 수구집단에서 개혁세력으로 넘어온 호기인데도 국민들의 삶은 사회양극화로 더 힘들어 지고 국민들은 개혁피로증이니 하며 개혁세력에게 등을 돌렸다.

기철일당을 숙청하여 친원부원배를 몰아내고, 원으로부터 고려의 자주권을 되찾고, 쌍성총관부와 요동을 정벌하였고, 국내적으로는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근본인 토지를 권문세족들에게 뺏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노비를 해방시켰고, 최영과 이성계를 등용하여 왜구로 백성을 구했고 유학을 받아들여 유학자인 이색, 정몽주 등을 중용하였으며, 변방의 일개 무장이었던 이성계와 시골의 선비였던 정도전을 문벌귀족으로만 가득 찬 개경조정으로 불러준 왕이 공민왕이다. 그래서 조선의 종묘에는 공민왕의 사당이 있다.

그렇다면 공민왕은 수많은 업적을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왜 실패한 개혁군주로 불릴까?

그것은 공민왕 스스로가 답을 한다.
첫째 왕은 '무일'의 약속을 어겼다. 게으르지 않겠다는 약속, 개혁을 위해서는 누구보다 강한 인내심, 부지런함, 추진력이 필요한데 왕은 신돈이나 왕의 측근에게 정사를 맡겼다. 그 시대에는 왕이 모든 권력의 핵심이다. 즉 왕이 개혁적이기 위해서는 개혁주체들과 정치적 의사소통이 원활하여야만 하며 이를 위해서는 부지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개혁을 위한 안정이 되어야 하는데, 안정을 위한 개혁이 되다 보니 결국은 백성을 위한 개혁이 아니라 왕권강화를 위한, 측근들을 위한 개혁이 되다 보니 백성들의 지지를 잃었다. 개혁세력인 신진유학자를 계속 등용하고 그들을 지지 세력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계속되는 홍건적, 왜구의 침입, 그리고 주위의 모반으로 인해 공민왕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측근들을 등용하게 된다. 즉 개혁과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는 '한비자'의 말처럼 '왕이 병들어 죽는 것은 반이 되지 않는다.' 왕이라는 권력의 두려움 때문에 신돈을 죽이게 되고 고려의 개혁은 급속도로 실패하기 시작한다.
지금 우리 처지도 14세기의 고려와 같지 않나 생각이 든다. 선거의 승리를 위한 개혁이 아니라 민중의 삶이 향상되는 개혁이 되어야만 개혁이 성공하지 않을까 생각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신돈의 개혁을 반대했던 최영과 고려의 양심적 문벌귀족들은 결국 개혁의 실패로 인해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는 아이러니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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