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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 꽃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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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희망연대 댓글 0건 조회 1,579회 작성일 05-12-0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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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 꽃이 되어
나는 아직도 몸과 마음이 아프다.
서정홍   
지난 11월 15일, 서울 여의도 문화마당에서《고 정용품 동지 추모와 쌀협상 국회비준 저지 전국농민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몸과 마음이 아프다. 그때 시위 현장에서 겪었던 일이 자꾸 떠올라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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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15일 여의도는 계엄령 상황을 방불케 했다.
2005-12-07ⓒhopenews

낮 한 시가 지나자 여의도 문화마당은 농민 형제들로 가득 찼다. 거의 일만 명 남짓 모인 것 같았다. 농민 형제들이 늘어날수록 전투경찰(전경) 수도 늘어나는 것 같았다. 노래와 구호가 늦가을 하늘을 울리고 노란 은행잎이 농민 형제들의 서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뚝뚝 떨어져 바람에 날렸다. 1부 ‘고 정용품 농민 형제 추모식’이 이어졌다. “한 송이 꽃이 되어 갔네. 그대 흘린 피 위에 우리의 맹세는…… 조국의 논과 밭 지켜 내리니 동지여 먼저 가시게. 해방의 나라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슬픈 추모곡이 끝나고 여러 단체 대표가 한 분씩 차례차례 나와서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농촌을 지키는 것은 부모를 지키는 거라고. 식량을 외국에 맡긴다는 것은 아이들 목숨을 외국에 맡기는 거라고. 열심히 일하는 데도 왜 농민들은 날이 갈수록 가난해 지는지 꼭 밝혀 달라고. 고 정용품 동지는 한해 내내 자랑삼아 집 앞에 태극기를 걸어 두었는데 국가는 그이한테 희망이 아니라 절망과 죽음만을 안겨 주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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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 농민이 연대한 경남민중대회
쌀협상 무효! 고 전용철농민 살해 규탄!
2005-12-07ⓒhopenews

늦가을, 벌써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는 때다. 가슴 속에 얼마나 깊은 절망과 분노가 쌓였기에 고향을 떠나 이 머나먼 서울까지 왔단 말인가. 논밭을 일구어 온 겨레의 목숨을 이어준 농민들이 서울에 왔으면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담당 공무원들이 나와서 “먼 길 오시느라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애써 지어 주신 곡식으로 우리 식구들 건강한 몸으로 편안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머리 숙여 인사하고 따뜻한 국밥이라도 끓여 내놓아야 ‘사람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 곁을 어떤 농민이 피범벅이 되어 비틀거리며 지나갔다. 얼른 다가가서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아주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전경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좁은 길에 많은 농민들이 한꺼번에 물러서는 바람에 어느 누구 한 사람이 넘어지면 수 십 명이 깔려 죽을 것 같아 큰소리를 질렀다.(80년대부터 나는 시위대 안전 담당을 맡은 적이 많았다.)

“자, 밀지 말고 앞을 잘보고 갑시다. 밀면 큰일 납니……”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위에서 ‘퍽’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잠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리고 얼마 뒤, 누군가 내 팔짱을 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비켜 주세요. 부상잡니다. 자 자 조금씩 비켜 주세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 머리에서 얼굴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내 머리가 방패에 찍혔다는 것을 알았고, 나를 살리기 위해 팔짱을 끼고 달린 사람이 서울에 사는 맹주형 아우란 것도 알았다.

십 분쯤 달렸을까? 마침 큰 길 신호등에 걸린 경찰차를 잡아타고 닿은 곳이 여의도 성모병원 응급실이었다. 닿아서 일이십 분쯤 지나자마자 응급실은 부상당한 농민 형제들이 밀어닥쳐 말 그대로 ‘피바다’였다. 나는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 속옷까지 피에 젖어 있었다. 머리가 얼마나 찢어졌는지 아무리 수건으로 눌러도 피는 멈출 줄 몰랐다. 그래도 ‘정신이 살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젊고 건강한 내가 다쳤으니 또 얼마나 큰 다행인가’ 싶었다. 아들 같고 손자 같은 전경들한테 맞고 짓밟혀 눈이 찢어지고 입술이 터지고 머리가 깨진 농민 형제들의 피에 젖은 옷을 벗겨 주기도 하고, 서로 위로도 하면서 수술 시간을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렸다가 겨우 수술을 했다. “소독할 시간이 없어서 그냥 기웠으니, 내일 다른 병원에 가서 소독하십시오.” 라는 의사 선생 말을 듣고 병원을 빠져 나오면서 ‘사람일은 내일을 모른다’는 말이 생각났다. 아니다 ‘사람일은 순간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늘 몸과 마음을 비워 두어야겠구나 싶었다. 그래야 쉽게, 편안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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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민중대회에 참가한 한 농민의 차량에 부착된 스티커
2005-12-07ⓒhopenews

한 뼘 남짓 찢어진 머리에 아무렇게나 쇠로 박아 놓은 부분이 욱신욱신한다. 이 아픔은 내 아픔이 아니다. 이 나라, 이 겨레의 아픔이고 슬픔이다. 그래서 더 아프고 슬픈 것이다. 전라도에서 경상도에서 충청도에서 여기저기서 농민대회 왔다가 나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과 아우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밥이라도 제 때 드시고 있는지…….
2005-12-07 11:45
2005-12-07ⓒ희망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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