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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연대, 독립투사 고 조문기선생 안장식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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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희망연대 댓글 0건 조회 1,463회 작성일 08-02-1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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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연대, 독립투사 고 조문기선생 안장식 참석
친일파 청산이 안 된 지금의 한국사회는 여전히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희망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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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청산은 바로 오늘의 독립운동이다"고 외치던 생전의 조문기 선생
2008-02-12ⓒhopenews

조국 독립과 올바른 민족정기 구현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고 조문기 선생의 영결식이 2월 11일(월) 오전 10시 서울 성공회 대성당 성프란시스홀에서 선생을 추모하는 인사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 문익환 목사 장례 이후 두 번째 겨레장으로 엄숙하게 치러졌다.
시민사회와 독립운동계, 학계, 정계를 망라한 각계 원로 중진으로 구성된 "독립투사 고 조문기 선생 겨레장 장례위원회"는 이날 오전 7시 대학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을 하고, 생전 고인이 이사장으로 몸 담았던 민족문제연구소를 들른 뒤 성공회 대성당으로 이동, 영결식을 거행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장영심 여사, 딸 조정화, 사위 김석화, 외손녀 슬아, 슬샘, 양자 조강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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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민관 폭파의거 현장인 서울시의회 본관 앞의 노제
2008-02-12ⓒhopenews

영결식을 마친 후에 부민관 폭파 의거 현장인 서울시의회 본관(중구 태평로)에서 다시 노제를 지내고 서울을 출발하여 수원 자택을 경유해 오후 3시 대전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서 거행된 안장식은 선생의 약력보고, 조사, 헌화와 분향, 조총발사, 하관, 성토 순서로 진행되었다.
김영만 상임고문과 김숙진 전 사무국장이 열린사회 희망연대를 대표해 참석, 고인의 명복을 빌고 고인의 유지를 이어받아 희망연대가 지역과 전국의 친일잔재청산에 계속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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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국립현충원에 도착한 운구행렬
2008-02-12ⓒhopenews

(이하 오마이뉴스 관련기사 인용)

조문기 선생은 누구인가

조문기 선생은 1945년 7월 24일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투쟁으로 널리 알려진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역이다. 1944년 소년의 몸으로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30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참여한 '조선인 멸시 규탄 파업'을 주도했다. 선생은 1945년 1월 조국으로 돌아와 항일비밀결사 단체인 '대한애국청년당(약칭 애청)'을 조직하고 친일파 거두인 박춘금과 총독부 주요 인사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박춘금의 '대의당' 집회 광고를 보고 7월 24일 친일거두가 총집결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인 부민관 폭파 의거를 결행했다. 이 의거는 가혹한 전시체제하에서 숨죽여 지내던 민중들에게 저항정신을 일깨웠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가 굳건히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과시하였다.
해방 후에도 선생은 '대한애국청년당'을 재결성하고 '인민청년군(대한청년군)'을 조직,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한 투쟁을 중단하지 않으셨다. 1948년 6월 2일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 기도에 저항하여 '인민청년군 사건'을 일으켰고, 그 결과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분단과 상처투성이 조국에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선생은 10년 정도 연극배우로서 유랑생활을 하신 적도 있다. 1959년 다시 '현실'로 돌아온 선생은 난데없이 '대통령 암살, 정부 전복 음모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때 당한 고문으로 허리를 다 펴지도 못하는 심각한 후유증을 평생 겪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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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연대를 대표해 안장식에 참석, 조의를 표하고 있는 김영만 상임고문
2008-02-12ⓒhopenews
 
선생께서 "독립이 되었어도 그 독립은 친일파들의 독립이요, 해방이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후에도 선생은 온 가족이 굶기 일쑤였던 생활고 속에서도 독립유공자로 이름 올리기를 끝내 거부했다. 부인까지 몸져눕게 되자 보다 못해 사위가 몰래 독립유공자로 등록해 선생은 1982년에야 '건국포장'을 받았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고 1983년부터 '광복회 독립정신 홍보위원회' 홍보위원이 되어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고, 1991년부터 8년간 광복회 경기도 지부장을 역임했다.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하자 "친일청산은 바로 오늘의 독립운동이다"라는 신념으로 투신,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에 취임하여 오늘까지 친일청산을 위해 온힘을 쏟아오셨다. 정부가 개최하는 3·1절이나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보다 진정한 조국독립을 위해 거리의 투쟁을 선택하셨던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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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파 청산이 안 된 지금의 한국사회는 여전히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던 선생. 편히 쉬소서
2008-02-12ⓒhopenews

그러나 2006년 11월 혈액암 진단을 받아 자택이 있는 수원과 서울을 오가며 항암치료를 받던 중 몸이 더욱 쇠약해져 치료를 중단하고 요양병원에 장기 입원하셨다. 최근 다소 병세가 호전되었으나 갑자기 악화하여 지난 2월 1일 중환자실로 옮기셨다가, 2월 5일 5시경 향년 82세로 별세하셨다. 생전 선생이 그토록 고대하던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불과 6개월 남짓 앞두고 별세함으로써 후진들의 애통함을 더하고 있다.
"나의 독립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독립운동사는 독립운동가만의 역사가 아니다. 미래를, 후손을 위한 운동이다. 과거사 청산은 친일파 청산부터 첫 발을 내디뎌야 하고, 친일파 청산이 안 된 지금의 한국사회는 여전히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선생의 어록에서)
2008-02-12 11:47
2008-02-12ⓒ희망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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