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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표지석 사건,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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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희망연대 댓글 0건 조회 1,367회 작성일 05-06-2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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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표지석 사건, 그 후
역사표지석이 또 하나의 역사를 쓰다.
김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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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성당 앞 제일은행 터 역사표지석
2005-06-21ⓒhope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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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은행 터 역사표지석
[근대금융의 효시]라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
2005-06-21ⓒhopenews

올해 초, 우리지역을 뜨겁게 달군 화젯거리가  하나 있었다. 이른바 '역사표지석 사건'이 그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희망연대 등산반 회원들이 팔용산에 등산을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수상한 빗돌 하나로 시작되었다.
발견 당시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이 빗돌이 등산로 입구에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모양새를 보고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거기에 "이 수원지는 1928년  11월에 일본인 혼다 쓰치코로우가 건설하였다. 이 수원지는 근대 마산 일원의 생활용수 및 공업용수를 공급해오다 1984년 12월31일 폐쇄되었다"라고 새겨져 있었고, 아무리 보아도'일본인 공적비'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 새김글이 친일청산을 주사업으로 하는 희망연대 회원들에게 심한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

 

뒤늦게 경남대 박물관이 마산시로부터 학술용역을 받아 24개나 설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중 몇 개의 표지석이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지만  희망연대는 오히려 건전한 논쟁을 기대했고 이를 위해 학술용역측과 마산시측에 역사표지석 바로 잡기를 위한 3자 협의를 제안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논쟁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일련의 사건으로 비약해 버리고 말았다. 여기에는 희망연대에 대한 모 언론의 악의적인 기사가 단단히 한몫을 했고 이를 시작으로 희망연대는 계속해서 많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어떤 형태로든 해결되어야 할 이 문제는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아 있을 뿐, 언제 수면위로 떠올라 또다시 뜨거운 화젯거리가 될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 당시, 24개의 역사표지석 중 희망연대가 문제삼은 것은 모두 4개로 제일 처음 역사표지석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마산 수원지' 역사표지석은 내용과 위치가 완전히 바뀐 채, 새로 세워져 있는 것을 최근에 확인했다.(사진 참고)

 

슬그머니 사라지거나 새로 세워진 역사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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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세워진 마산수원지 표지석
2005-06-21ⓒhopenews

두 번째로 문제가 되었던  신마산 월남 성당 앞에 세원 둔 "일본 제일은행 마산출장소 터"라는 표지석은 언제부터인지 슬그머니 사라지고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표지석은 당시 희망연대로부터 '역사가 없는 역사표지석'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곳은 1907년 마산에서 근대적 금융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일본제일은행 마산출장소가 있던 자리이다"라는 새김글은 이 역사표지석을 세운 이들의 역사관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참고로 제일은행은 개항이후 조선에 제일 먼저 진출한 은행으로서, 일제의 조선침략에 첨병역할을 담당한 곳이었다. 1905년(을사늑약) 일본인 재정고문에 의해 화폐개혁이 단행되었고, 신, 구화폐의 교환과정에서 우리나라는 많은 금융자산을 수탈 당하여 심각한 금융공황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때 화폐개혁을 전담한 곳이 바로 일본 제일은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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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석이 사라진 월남성당 앞
2005-06-21ⓒhopenews


이런 일제 수탈의 역사를 알고 표지석의 내용을 다시 읽어보면 '마산에서 근대적 금융의 효시'라는 표현은 마치 "마산 아구찜의 원조"라는 말처럼 매우 긍정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어 이 역사표지석이 일제의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감추고 미화한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희망연대는 학술용역측과 마산시에 이 표지석을 철거하고 대신 바로 위에 위치한 제일여고교문  앞에 ' 이 자리는 일제 신사 터' 라는 표지석을 세우자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학술용역측은 내부에서 의논을 해보겠다는 대답이었고, 마산시 관계자는 난색을 표하며 내용만을 수정해서 다시 세우자는 안을 내 놓았다.(3월 16일) 이후, 한차례 마산시 담당자가 희망연대 사무실을 찾아와 똑 같은 안을 제시했으나 희망연대 측과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마산시가 합의 상대자인 희망연대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철거를 해버린 상태로 그 처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세 번째는 가포에 있는 경남대학 재단 부지 안에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은 상태로 세워져 있는 '가포청동기 출토지' 표지석이다. 이는 본래 목적 중의 하나인 시민들의 접근성은 말할 것도 없고, 시민의 세금으로 세운 역사표지석이 마치 경남대 소유인양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희망연대는 표지석을 밖으로 들어내던지 아니면 경남대학이 철책을 풀던지,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오늘 현재까지 처음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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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입금지 구역 안에 있던 표지석
2005-06-21ⓒhopenews


마지막 4번째 문제의 역사표지석은 철거나 내용 수정의 문제와는 무관하게 또 다른 차원에서 문제가 제기된 표지석이다.
이는 경남대 정문 앞에 새워진 것으로서 일본의 '조계지 구역'이라는 표지석이다. 옛 일본 조계지 구역은 일본영사관 터와 헌병분견대가 있는 지금의 신마산 일대이기 때문에 구태여 특정한 장소를 조계지라고 표시하는 표지석을 세우는 것은 그야 말로 '표지석을 위한 표지석일 뿐' 이라는 문제 제기였었다. 

 

표지석 논쟁을 주도했던 희망연대 김영만 상임대표는 역사표지석 논쟁은 아직 끝난 것은 아니라는 단서를 달면서 "상처뿐인 '역사표지석 바로 세우기 운동'이었지만, 상처 입은 소나무에서 송진이 나와 나중에 어둠을 밝히는 광솔이 되듯, 우리의 상처 속에서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송진같은 피고름이라도 흘러나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역할은 다 했다" 고 말했다.

2005-06-21 17:25
2005-06-21ⓒ희망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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